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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와 황순원은 비슷한 연배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함 20c후반 한국 소설계의 거목이다.

삶을 사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김동리선생은 개성고등학교 황순원은 와사대대학 영문학과 졸업. 김동리는 문단정치에 관여를 많이했다. 파벌의 중심권에 있었다. 황순원은 문단정치에 초연한 순수한 소설가다. 공통점은 시,소설,단편에서 장편으로 문학세계를 확장해갔다. 문학인으로서 삶의 자세는 대조적이었다. 김동리선생은 권력과도 손을 잡음. 황순원은 글로만 외골수적이다. 두분다 교수직을 겸함. 황순원선생은 월남했다. 16세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함. 동아일보 신춘문예 가작을 함. 육이오를 배경을 한 소설이 많다. 학(옛날 우정을 생각해서 친구를 풀어줌. 주제는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너와나만의 시간(패전병다룸). 제일처음 장편 별과 같이 살다. 호평보다 혹평이 더 많다. 소설적 구성이나 내용상으로는 단편적요손데 길이만 긴 장편이다라는 비난을 받음.

 

카인의 후예 등 장편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함. 카인의 후예 박훈. 오작룡?여자가 결혼을 햇음에도 박훈을 좋아하는 지순한 여자로 나옴. 인간접목. 고아원의 암흑상을 파헤침. 나묻ㄹ 비탈에 서다. 6.25 젊은이들의 고뇌.일월은 가문이 몰락하는 가족사 이야기 같지만 현대인의 고독. 가족간의 단절. 사회와의 단절. 단절을 소재로하고있다. 현대인의 숙명적 고뇌. 외래전래적 사상의 융합을 추구 신들의 주사위. 황순원 장르 주제적 다양함. 꾸준히 작품을 발표함.  가장대표적 진면목은 일월이다

 

일월 줄거리.

인철과 가족 중심. 인철,인주. 나미(인철의 지인, 은행가딸), 기룡(사촌), 형은 인호(철저힘숨기고자함.).인문(고딩) / 기룡이가 인철이에게 칼을 줌. / 인주에게 대본(백정)이옴./ 신명수(인주남친) 인주가 남준걸과 불륜. 범인은 신명수다. / 마직막 다혜의 고백에 인철이가 다혜의 볼에 친구의 표시로 뽀뽀함.

 

전체

아버지 융자 독촉받음으로 자살. 형.은 국회의원 걸림돌, 인주 인철 걸림돌, 상진영감(아빠) 외도 가정이 그늘이 짐. 가족관의 단절감. 부부사이 불화. 어찌보면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고독감이다. 엄마와 아들사이 동물(뱀) 키우는 문제. 형제간 남내간 갈등적-대화가 거의 없음. 고독의 벽 속에 갇힌 모습이다. 실존적상황을 주제로 담고 있다. 사랑의 삼각관계 인철 대 다혜와 나미. 친구처럼 누이처럼 다혜. 은행딸 나미. 인철은 마음 속으로 늘 고민한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나미쪽으로 기움.

의리보다 실리를 택한다.는 현대남성이다. 장편소설의 주제는 불행에는 원인이있다라는 인과적문제. 다의적인 주제를 담고있다. 가장 두드러진 주제의식은 현대인 담고있는 고독이다. 풀리지 않는 숙명적인 고독, 가족, 연인으로도 달래지지 않음. 문체 서정적. 심리적으로 치열하게 노골적으로 나타남. 6.25 사건이 배경이 대다수. 한국인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외국에 의해서 치루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이 우리 민족을 비참함이다. 이런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다. 처절한 참상도 리얼하게 제시 되지 않았다. 우리의 비극의 원천에 대해서 인식해야하는 고발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황순원작가의 장점은 폭넓은 주제를 꾸준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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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은 문학연구

평론하고 깊은 관계가 있다. 작가론을 하려면 평론을 알아야된다.

어떤학자는 문학비평하고 논문하고 깊은 관계가있야한다

 

논문 예) 문법에 맞게 생명

비평 내용보다 표현을 중요시한다.

사실 연구문장하고 평문문장은 정반대이다. 그런데 현대는 같게보는게 많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문학논문이 평론화되는게 추세이다.

-----포인트 :연구한내용은 독특, 내용은 연구내용은 객관적(=문법에 맞도록)

결국 문학연구의 추상화 된다.

 

작가론의 특징

작가의 생애를 다 기술하는게 아니고, 작품을 잘 이해하기위해서 작가의 생애를 안다.

   작가의 정신적 분신이지만 삶과 내용이 일치되는건 아니다. 일치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대일 대응 ㄴㄴ ---전기적오류다. 작가론 = 문학적 전기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분석하는것이다. 예 발자크, 이효석(지극히 보수, 작품 불륜관계를씀)

   삶의 노선과 작품노선이 다르다. /김동리(장사형 인물 많다. 실제 체구 작다. 콤플렉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치되는경우 생택쥐페리

 

작가론 2개

1.동시대작가론

(같은시대 체험을 공유하는 시대, 작가와 만난다. 자룔을 얻을 수 있다.

작가한테 자신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밝혀서는 않다. 왜냐하면 문학가들은 허영이 많다. 그래서 의도가 개입 될 수 있다.

직설적 질문x, 유도적 질문 o 예 장만형작가.

순희라는 인물이 작품에 많다. 실제로는다방여자였다. 산호장 시절을 회상하도록 해서 객관적으로 해서 판단해서.연구자라는 사실을 숨겨야한다.

 

2.후시대작가론

(김만중. 자료에만 의존해서 그 작가의 작품을 살피는것)

 

전기에 빠져가지고 그 성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어야 하는데 소홀히 할 수 있는 폐단이 있다.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찾는 거다.전기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생애를 순차적 기록은 의미가 없다.

특징을 찾아서 작품과 연결 할 수 있어야한다. 전기를 위한 전기가 아니고 작품 해석을 위한 전기가 되어야 한다.

 

작품을 분석할 때 작품과 작품사이에 반복되는 단골 이미지, 단골 화소가 있다.

유사한 이야기, 이미지가 반복된다. 그것을 찾아서 유사성을 찾아 작가의 생애를 찾아관련지어야한다.

예 시인 정지용 독특하게 언어나 이미지를 변형시킨다.

독특하게 자부심이 강하고 평범하지 않고 개성이 강한 시인이다.

생애를 살펴본다. 정지용은 4대독자다.

 

연못지 용용 용꿈을 꾸고태어났다.

넌 용이 된라는 의지를 이름 속에 넣었다. 즉 귀하게 자랐다.

그는 자만심이 강한 개성이 강한 시인으로 성작했다.

 

작가를 나눌 때 특징상

 

지속형인 작가

이기형 소설가 작품주제나 경향이 일관성

정환 소설과 지속적  장만형

         

지속형 작가들 연구방법 : 통시적으로 연구해야한다. 작품의 주제나 경향을 통시대적으로 보고 계열화 시켜서 연구한다.

 

변모형의 작과

변모현 김동리, 시인 김기린 아주 변모형이다.

변모 과정을 연구, 변모의 원인이 생애와 무슨 연과이 있는가가 작가론에서 아주 중요하다.

          서정주, 김춘수, 변모의 기준

          김춘수 자기가 의미를 들어날 때와 숨길때 가 변모의기준

          서정주 주제의 기준으로 보면 변모의 기준이 있다

          김기림  소재를 중심으로 변모의 기준

          박목월  자연을 소재로 도시 생활 삶으로 기준으로 변모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변모가 중용 / 변모가 작가 더 많다.

변모론 적은 연구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기계론 적으로 이렇다라고 말하면 라고 말하면 안되다.

 

 

춘원의 호에대한 설명 

춘원의 호 외배 고주 보경 경서학인 장백산인 향산광망 산광명 창씨개명한 이름

호 많다 = 활동을 많이 했다.

폭넓은 활동으로 인해 호가 많다. 호가 많다. = 작품이 많다. 다산 정약용

 

현대 춘원 욕당 요한 호가 많으니, 작품이 많으니 평가도 복잡하다.

왜그렇게 찬반이 엇갈리는가

 

춘원은 한국근대소설의 개척자다. 천태산인 한국최초의 현대소설의 개척자다

 

부정적인 평가 친일 행위를 함,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결핍된 사람이다.

부정적인 평가 정리되어있다.

 

철학이 없는 계몽주의자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주의자 / 한국의 실학 사상에 대한 무지

 

 소설기법상 결점( 영미에 반해서)

과잉노출, 논설적, 우연성(흥미위주다.)-필연성이 없다.

 

무정을 살펴보자.

무정이 현대소설으로서 무게를 가진 작품인가?(최초래이게 최초 현대소설이래)

남녀 애정관한 내용 삼각관걔의 애정소설

춘원은 낭만주의자 그 당시 학생들의 꿈을 담은 인물이 이형식

당시 젊은이들의 꿈 일본유학을 가서 성공해서 돌아오는 것

 

이형식(영어교사) 박영채(기생) 김선형(부잣집딸,신여성)

박진사(헌신적교육자) 김장로(평야감사 아들 전직 외교관)

 

이형식은 박진사의 딸, 김선형을 택함

 

신우선(형식의 친구, 적극적 진취 이형식과 반대 이형신 소극)

김병옥(신여성 독신주의자)

 

무정의 시간적구성 (총126회 신문에 연재된 장편 소설)

오른쪽 숫자는 횟수를 말함

이 소설은 전대 소설을 비해서 뚜렷한 시간구성으로 이루어짐

예 1. 17 첫날은 17회에 거쳐 나옴

 

1. 첫날 오전과 오후로 전개 됨. 아주 기분이 좋음. 

    첫날은 대개 영채의 회고담으로 구성됨

    영채 교육사업하다 살인사건에 연루 되어 감옥 갇힘

    영채는 몸을 팔아 아버지를 구하려 하지만 아버지는 자결함

 

2. 학생들이 strike를 이르킴. 사실 선형이는 학생들의 파업에는

관심이 없고, 어제밤에 영채를 생각함. 그리고나서 영채를 만나려

간다. 영채가 평양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에 감. 평양가서

(자신의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함)

 ->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김을 소설로 표현했다는 평론가도 있음

 

영채가 유서를 씀. 정절을 지키려했으나 겁탈을 당함으로 살가치가 없다고

자결을 결심하고 평양(아버지 무덤)으로 떠남.

신우선은 영채를 찾가 간다. 유서만 발견

유선은 평양으로감 박진사의 묘소를 찾아간다.

 

다음날 돌아감 학교로 돌아감. 많은 일이 벌어짐.

학교에 기생을 찾아 떠남을 알고 풍문이 떠돔.

그일로 학교를 사퇴하게됨. buy은 선형과 약혹을 하게됨

 

복합적인 문제로 혼란을 격음

 

독자들이 궁금해함. 영채가 죽었나 살았나.?

작가는 영채에 대한 얘기는 없고 다른 얘기만 한다.

평론가 : 김동인이 공격한다. 다뽀로다. 다뽀로 : 중요한것을 나두고

딴소리한다. )

 

이 소설은 1,2,3,4,5째날. 뚜렷한 시간구성이 명확이 드러나고, 전개되고

그후 10개월간 내용이 나옴

거기서 병옥이라는 신여성을 만나고 영채는 생각을 바꾼다.

영채 봉건적인 여성. 신여성 병옥을 만나고 신사상을 받아드리게 된다.

병옥이를 따라가서 같이 생활한다.

병옥이는 독신주의자이고 신여성이다.

한달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이형식과 선형과 약혹하고 일본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데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흥미위주가 아니냐. 결점지적

 

기차가는 중에 홍수가 남. 거기서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서

상화엥서 이형식이 연설을 하고 계몽주의적 사상 피력.

 

말미에서 4사람다 성공해서 돌아온다고 한다.

 

한달동안 집필함.

 

무정은 두가지 요소로 결합되어있다.

영채에 관한 부분 회고담. - 신소설적인 부분

춘원 자신의 자소전적 느낌

 

자가 춘원과 이형식과 유사점이 상당이 많다.

작가,주인공 누이가 있고 어린시절에 부모를 여임

신분도 유사 일본유학 유학생 연형도 같고, 소설에 나오는

박진사라는 인사와 박찬명 대령집에서 비서노릇을함

박진사와 이형식, 박찬명과 춘원.의 관꼐가 비슷한다.

딸들의 유사점. 그러므로 자서전적 요소가 많다.

 

소설사적으로 어떤 영햐잉 있는가

문장 호흡이 길고, 이걸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잘 했다.

문장상의 장점

주제상에서 당시의 시대정신과 사회의식을 잘 반영햇따.

자유연애, 사회상. 실리를 택한 이형직

 

문체상에서 일상어 문체 확립함. 시제의 분화 하도다. 하는다.

과거 현재가 불명확한 문체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구별가능한 구어체를 사용.

대명사를 씀. 대명사 사용은 문제가 되는데 여자와 복수 구분없이

그를 썼다. 춘원은 그냥 단수,복수,남,녀 구분 x

시간 구성

독특한점 보조 인물의 배치로 인물을 입체화 시킴

이형직 우유부단 소극적인데

신우선이라는 적극적인 인물을 배치함으로서

영채라는 인물 유교적 질서에 사고방식 구시대적 사고방식

병옥이란느 인물 배치 신사사을 받아들이게 하고

인물을 입체화 시키기위해서 입체화 시켰다는점

 

심리묘사가 두드러졌다.

사건의 스케일이 커졌다.

 

장편소설로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단점설명

주인공의 성격 창조와 주인공의 실패

예 이형식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 기생을 찾아다님.

교사들사이에 호모섹서로 소문 이윤배반적이라는 인물 설정

교사면 공직성. 인물모순 실리추구

영채 기생으로서 정조관념을 추구했다는점

이런건 모순적 인물을 창조햇다는점에서 주인공의 성격 창조를

실패했다.

 

필연성이 결여된 통속적인 사건이 있다.

예 개의 비현실적 출연.

영채가 남의 집살이를 한다. 집주인, 괴한을 만남.

괴한을 개가 물리친다. 겁탈당할 직전에 개가 물리침

두가지점

신문소설 애로틱함 겁탈당할뻔 신문소설이 요구하는 특징

            + 개가 등장함 비현실적인 개의 출현

필연성이 결여된 통속적인 사건으로 봄

 

박진사가 제자의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가서 자결한점

죽을 이유가 없다.

 

이형식이 변덕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기생을 쫓아 다니고

홈어로 소문나 있고 이것은 배반적인 인물로 보인다.

 

영채가 평양사에서 겁탈당하는 장면을 목격한것

신문 연재소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신문소설 상당히 애로틱한것을 요구

 

거의다 신문 소설이다. 순수소설이 아니다.

여건이 없다.

 

무정만이 아니라 무영탑, 등등... 많은요소들이 이같은 요소가 있다.

 

통속적이것 기차 속에서 만나는 것

->흥미위주다. 필연성이 결여된다.

 

그러나 현대소설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작가의 전기적인 특징이 작품에 드러나있는거 를 밝히는게 중요

 

고아라는것 10살때 부모를 다잃음 외배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와 같다.

호 에도 반영했다. 유교사상 부정 반유교적 입장에서 문학활동을 했다.

자녀 교육론이나 논설에 보면 효도사상 보다는 자녀를 더 소중히 해야한다.

정조개념에 대한 부정

 

재주있어서 엘리적 의식이 강했다. 나르시즘에 빠져서 자신의 행위를 미화시켰다.

친일 행위도 미화함

 

약소민족체험: 동학에 가담해서 비서노릇을함. 망국의 서로움을 시에 많이 반영시킴

자주독립을 각성하는 글을 많이 씀 젊었을때. 약소믽고체험을 젋었을때 자주의식강화라는 것으로 글을 씀

 

작가체험 :고대소설을 많이 읽었고, 한시문에 밝음, 일본어를 통해 톨스토이를 경도함. 좋아함.

 

4개 / 그런요소들이 작품에 잘 반영되어있다.

 

왜 춘원을 현대 소설의 개척자라고 하나. 무정부터 현대소설의 출발으로 보는 이유

김태준의 소설사에서도 현대소설의 첫작품을 무정을

백철이 쓴 국문학전사에서도 무정

조향연 현대소설사 무정을

현대소설으로 뽑는다.

 

많은 비평가 평론가가 무정으로 뽑는다.

현대소설의 출발의 기점으로 잡는다.

 

많은 결점이 있었다. 주인공 성격이 이율배반적이다. 성격창조실패

작가의식 과잉 노출 우연성, 통속성 많다.

 

무정 작품톤이 안 맞는다. 박영채 이형식이다. 중요인물은.

박영채의 회고담이 길다. 이는 신소설적 요소다.

후반부는 춘원의 자소전적 요소다.

소설적 결함이다.

 

그것은 작품내적의 필연성이라기 보다는 상황성이다.

무정은 문화적 사건이다. 신문에 소설이 연재되는 것은.

무정에대한 독자들의 인기가 선풍적이였다.

 

신문연재소설상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압도적인 영향.

문화적인 사건이 소설적 영향이 문학사적인 평가로 이월되는 현상이 나타남.

결국 중요시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황에 의해서

이소설이 문화적 상황에서 중요한 작품이되었다.

 

작품내적 보다 작품외적인 사건에 의해서 높이 평가 받았다.

신문사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결점이 많이 보임

외국 문학연구자들에 의해 비판을 많이 받았다.

외국 문학의 수준과 무정의 수준을 비교하면 부족한부분이 많다.

신소설에 비하면 많은 장점있다.

심리묘사 유연한 문장을 통한 작가의 내적 세계를 언어로 표출해가지고 신소설과는

다른 면모의 소설을 보여졌다.

 

통속성이라든지 극복한 작품은 무명

무명은 리얼리틱함. 시의 시대 정신을 작품에 반영함.

유정이라는 작품.

유정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영화도 3번이나 찍음

유정은 무정에 비해서 훨씬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 체험적인 요소가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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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사 한시해석2 과제

登潤州慈和寺上房(등윤주자화사상방)-崔致遠(최치원)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崔致遠(최치원)

登臨暫隔路岐塵(등임잠격노기진) : 절에 올라보니, 잠시 속세 티끌 벗어났다

吟想興亡恨益新(음상흥망한익신) : 흥망을 읊어 생각하니 한이 더욱 새로워라

畫角聲中朝暮浪(화각성중조모랑) : 피리소리에 아침저녁 물결 일고

古山影裏古今人(고산영이고금인) : 오래된 산 그림자 속엔 고금의 많은 사람

霜摧玉樹花無主(상최옥수화무주) : 서리 내린 나무에 임자 없는 꽃이라

風暖金陵草自春(풍난금릉초자춘) : 바람 따뜻한 금릉 지방 풀은 절로 봄이다

賴有謝家餘境在(뇌유사가여경재) : 마침 거부 사씨 집안 땅이 남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장교시객상정신) : 길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을 맑게 하는구나

인간세상을 뛰어넘는 시인의 초연한 세계를 회고적으로 노래하여 문장가로서의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다. 최치원은 입당등제(入唐登第)하여 그곳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거니와, 특히 이 작품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가 중국에 알려진 초기의 것으로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장사꾼들 가운데에서 시를 구득(購得)하려는 자는 모두 이 시를 써서 보일 정도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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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렀네.

장마비 그쳐 향기 날리고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통일 신라 말, 대문인(大文人) 최치원의 오언 율시(五言律詩), '촉규화(접시꽃)' 라고 하오.

 

당나라 유학 시절,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형상화 하고 있소.

당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거친 밭(신라)'에서 태어났지만 그 어느 당나라인보다 학문적 지식이 뛰어난

'탐스런 꽃송이'인 자신을 '수레와 말 탄 사람(고위 계층)'이 알아주지 않고 정작

'벌과 나비(자신보다 못한 범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애석하고 한스럽다는 의미라 하오

큰 포부를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건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길거리의 흔하디 흔한 접시꽃(촉규화)로 비유한 최치원의 체념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오.

그러나 참고 견딘다는 그 말과 같이, 마침내 학자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니, 이 글을 읽는 무림동도께서도

부디 지금 '나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 하여 포기하지 말고 자기자신을 믿으며 굳건히 버텨야만 하오.

절대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겠지..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으리?

그 어떤 압력과 고통에도 견딜 수 있도록, 무림비급 <금강불괴>를 강력하게 권하는 바,

지금 무림비급의 이름아래, 당신의 혼을 더하시오!

이 시는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접시꽃 촉규화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노래한 오언 율시의 한시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개간하려고 않는 척박한 곳에 쓸쓸히 피어 있어 아무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는 흔한 접시꽃을 통해 당대 신라의 척박한 풍토를 풍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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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야산>은 자연의 물소리에 의탁하여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를 멀리하고자 하는 은둔의 결의를 노래한 작품이다. 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여러 바위들을 바쁘게 달려 이산저산에서 아우성치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을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시비가 귀에 들릴까 늘 걱정되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감싸게 한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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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오기(新羅五伎)의 하나.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에서 월전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깬 솟고 목은 움칠 꼭다린 오뚝,(肩高項縮髮崔嵬)

여러 한량 팔 비비며 술잔 다툰다.(壤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 듣고 나서 웃어젖히며,(聽得歌聲人盡笑)

초저녁이 지새도록 깃발 붐빈다(夜頭旗幟曉頭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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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최행귀(崔行歸)의 예경제불송(禮敬諸佛頌)

以心爲筆畵空王(이심위필화공왕) 마음으로 붓을 삼아 그린 부처께

瞻拜唯應遍十方(첨배유응변시방) 우러러 절하나니 시방 두루 하오시라

一一塵塵諸佛國(일일진진제불국) 하나 하나의 티끌마다 부처 나라요

重重刹刹衆尊堂(중중찰찰중존당) 곳곳의 절마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법당이어라

見聞自覺多生遠(견문자각다생원) 보고 듣고 먼 여러 생을 스스로 깨우치니

禮敬寧辭浩劫長(예경영사호겁장) 예배와 공경에 어찌 겁을 마다하리까

身體語言兼意業(신체어언겸의업) 몸과 말과 더불어 생각으로 이루니

總無疲厭此爲常(총무피염차위상) 전혀 피곤과 싫증이 없이 이를 한결같이 행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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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기서, 동문선 권 19>

 

一別征車隔歲來 전장으로 가는 수레 한번 이별하고 해가 바뀌어 오네

幾勞等覩倚樓臺 누대에 기대어 기다리고 바라기를 얼만 애썼던가.

雖然有此相思苦 비록 이토록 서로 그리는 괴로움 있다 하여도

不願無功便早廻 공을 못 이루고 일찍 돌아오길 원하진 않는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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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학당 최충

滿庭月色無煙燭 뜰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이요

入座山光不速賓 방안에 든 산 그림자는 서두르지 않는 손님일세.

更有松絃彈譜外 솔바람 소리는 악보에도 없는 음악을 들려주니

只堪珍重未傳人 다만 보배롭게 여길 뿐 남에게 전해주진 못하네.

龍騰虎距列穹豊 용이 나는 듯 호랑이가 버틴 듯 큼지막히 늘어서

壯氣能銷鳳炭紅 씩씩한 기운은 봉황이라도 붉게 구워낼 듯하네.

莫向晨昏爭燕蝠 제비와 박쥐에게 새벽이니 저녁이니 다투지 말고

好將行止付天公 나아가고 물러나길 하늘의 뜻에 맡김이 좋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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掛眼東門憤未消 눈알을 빼어 동문에 걸어 두어도 분노가 덜 삭아

碧江千古起波濤 푸른 강물이 천년 세월에 파도를 일으키네.

今人不識前賢志 오늘날 사람들 옛 현자의 뜻은 알지도 못하고

但問潮頭幾尺高 다만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묻고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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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城一面溶溶水 긴 성 한쪽은 콸콸 넘치는 물이요

大野東頭點點山 큰 들 동쪽 머리는 점점이 산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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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 1075~1151)

045 감로사 <감로사차혜원운

俗客不到處 속세 나그네 이르지 않는 곳

登臨意思淸 올라 보니 마음이 맑아지네.

山形秋更好 산 모양은 가을에 더욱 좋고

江色夜猶明 강 빛은 밤에 오히려 밝구나.

白鳥高飛盡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孤帆獨去輕 배는 외로이 혼자 떠가네.

自慚蝸角上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半世覓功名 반평생 헛이름만 찾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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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知常詩 정지상 서도

紫陌春風細雨過 번화한 거리 봄바람에 가는 비 내려

輕塵不動柳絲斜 가벼운 먼지 일지 않고 실버들만 늘어졌네.

綠窓朱戶笙歌咽 푸른 창과 붉은 문에선 목 메인 노래 가락

盡是梨園弟子家 바로 그 모두가 이원의 제자 집들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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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

패강루강제영(浿江樓舡題詠) 대동강 놀이베에서 읊음

수안유유양류다(水岸悠悠楊柳多) 물가 언덕 한가롭게 버들숲들 참 많은데

소강요창채련가(小舡遙唱采蓮歌) 저 멀리 작은 배선 연밥 다는 노래 소리

홍의락진추풍기(紅衣落盡秋風起) 붉은 꽃잎 다 떨어져 가을 바람 불어오니

일모방주생백파(日暮芳洲生白波) 해진 무렵 물가에선 하양 물결 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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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인물 백이숙제 주나라무왕 주나라문왕 해석

 

1.백이숙제

중국 주(周)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고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그 무렵 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왕(紂王)을 토멸하여 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수양산 首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2.무왕

중국의 주(周)를 건국한 왕으로, 기원전 1046년 서쪽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商)을 멸망시키고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성(姓)은 희(姫)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주(周) 문왕(文王) 희창(姫昌)의 둘째아들이므로 중발(仲發)이라고도 한다. 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靑銅器)에서는 ‘무(珷)’라는 글자로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1050년 무렵부터 희창(姫昌)의 뒤를 이어 관중(關中) 평야에 중심지를 둔 주족(周族)을 이끌었으며, 서쪽 제후(諸侯)들을 규합해 (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였다.

 

(商) 말기에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생활했으며,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짓느라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怨聲)도 높아졌다. 무왕(武王)은 (商)을 정벌하라는 희창(姫昌)의 유지(遺志)에 따라 태공망(太公望) 강(姜尚)과 주공(周公) 희단(姫旦), 소공(召公) 희석(姫奭) 등을 중용(重用)하여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1048년 무렵에는 맹진(盟津)에서 800여 제후(諸侯)들의 회맹(會盟)을 이끌며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하였고, 기원전 1046년에는 부패한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촉(蜀), 강(羌), 무로(髳卢), 팽(彭), 복(濮) 등의 부족과 연합하여 (商)을 공격하였다. 300승(乗)의 전차(戰車)와 45000명 정도의 병사(兵士)를 거느린 주군(周軍)은 허난성[河南省]의 목야(牧野)에서 (商)의 70만 대군(大軍)과 맞섰는데, 군(商軍)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던 노예병들의 반란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주왕(紂王)은 녹대(鹿臺)에서 자살하였고, (商)은 주(周)에 점령되어 멸망하였다.

 

무왕(武王)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인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버지인 희창(姫昌)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商)의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을 하다 살해된 비간(比干)을 다시 장례 치르고, 유폐(幽閉)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商)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부족이나 공신(功臣)들에게 대규모로 분봉(分封)하여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다른 부족들에 분봉하여 신농(神農)의 후인(後人)들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인들은 계(蓟, 지금의 天津 蓟縣)에, 요(堯)의 후인들은 축(祝, 지금의 江蘇 赣榆)에, 순(舜)의 후인들은 진(陳, 지금의 河南 淮陽)에, 우(禹)의 후인들은 기(杞, 지금의 河南 杞縣)의 제후로 각각 봉(封)했다. 또한 (商)의 유민(遺民)을 통제하기 위해 주왕(纣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商)의 수도였던 은(殷)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주왕(纣王)의 이복형인 미자계(微子啓)에게 (商)의 제사(祭祀)를 잇도록 하며 송(宋, 지금의 河南 商丘)의 제후로 봉(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 주위에 자신의 3명의 아우들을 분봉(分封)하였다. 관숙(管叔) 희선(姬鲜)을 관(管, 河南 鄭州)에, 채숙(蔡叔) 희도(姬度)를 채(蔡, 지금의 河南 上蔡)에, 곽숙(霍叔) 희처(姬處)를 곽(霍, 山西 霍州)의 제후로 봉했으며, 이를 ‘삼감(三監)‘이라 하였다. 또한 주(周) 건국에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강(姜尚)에게 제(齊, 지금의 山東 營丘)를, 주공(周公) 희단(姫旦)에게 노(魯, 지금의 山東 曲阜)를, 소공(召公) 희석(姫奭)에게 연(燕, 지금의 河北)을 각각 분봉(分封)하였다.

하지만 무왕(武王)은 주(周)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성왕(成王)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이 되어(주공이 왕위를 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통치하였다.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함께 요(堯)나 순(舜), 하(夏)의 우(禹), (商)의 탕왕(湯王)과 더불어 후대(後代)에 성왕(聖王)으로 숭앙(崇仰)되었다.

 

 

3.문왕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 덕치에 힘썼고, 상나라와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제후들의 신뢰를 얻었다. 유가로부터 이상적 군주 칭송 받았다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상(商)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상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민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허강[黃河]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베이[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渡河點)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상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만년에는 위수(渭水)에서 만난 현상(賢相) 여상(呂尙: 태공망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상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상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왕(발 發)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

 

 

4.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중국 주(周)나라의 정치가.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해 제도문물을 창시했다. 상족(商族)을 회유하기 위해 아들을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요지에 배치해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해 수비를 공고히 했다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당시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다시 동방을 원정(遠征)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부근 낙읍(洛邑:成周)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중원(中原)의 요지에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5.강태공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본명 강(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望)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6.걸왕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 최후의 왕. 포악하고 사치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에는 그가 "부도덕하고 은(상(商))나라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사. 이름 이계(履癸). 제발(帝發)의 아들로, 상(商) 왕조 최후의 왕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걸주(桀紂)라고도 하며, 흔히 이상적 천자로 추앙받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웅장한 궁전을 건조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워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거기서 남녀 합환의 유흥에 빠졌다고 전한다.

 

사기(史記)》에는,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나라(상나라)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그가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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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사 한시 해석

맥수지가

기자(箕子)가 고국 은(殷)나라가 망한 뒤 황폐해진 궁궐에 보리와 기장만 무성한 것을 보고 한탄하며 불렀다는 노래로, 나라가 망함을 한탄한 노래의 의미로 쓰임.

 

맥수지가(麥秀之歌)라고도 함.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가는 길에 옛 은허를 지나다가, 궁실이 허물어져 그 터에 벼왈 기장이 자라는 것을 보고 맥수가를 지었는데,

노래를 보면, “보리 이삭은 점점 자라고/벼와 기장 기름지기도 해라/저 교활한 아이는/나와는 사이가 좋지를 않네(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라 하였다.

 

시 속의 교동(狡童)은 은나라의 폭군 주(紂)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포학한 정치로 은나라가 결국 망하게 되었음을 풍유한 것이다.

은나라의 백성이 이 노래를 듣고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후대에 전(轉)하여 ‘맥수지탄(麥秀之歎)’은 고국의 멸망을 한탄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공무도하가

공무도하(公無渡河) : 공(公) 하지마라(無) 강을 건너는 것(渡河)을

공경도하(公竟渡河) : 공(公)은 마침내(竟) 강을 건넜다(渡河)

타하이사(墮河而死) : 떨어졌다(墮) 강(河)에 그래서(而) 죽었다(死)

당내공하(當奈公何) : 그것을(當) 어떻게 해야하나(奈) 공(公)을 어떻게 해야하나(何)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죽었으니,(墮河而死)

장차 임을 어이할꼬.(將奈公何

 

등장인물 :

등장인물 1. 백수광부 - 흰머리(백수)에 미친(광) 남편(부)

등장인물 2. 백수광부의 아내

등장인물 3. 곽리자고 - 뱃사공. 백수광부가 물에 빠져죽고 이어서 그의 부인이 빠져죽는 것을 목격함.

등장인물 4. 여옥 - 곽리자고의 부인

 

줄거리 :

백수광부가 강을 건너려는 것을 백수광부의 부인이 말렸으나 백수광부는 결국 강을 건너다가 빠져죽었다. 백수광부의 부인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며 공무도하가를 지어 부르고 자기도 이어서 강에 빠져 죽었다.

이것을 목격한 뱃사공 곽리자고는 퇴근 후 자신의 부인인 여옥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여옥은 이야기가 슬퍼서 공후라는 악기를 꺼내어 공무도하가를 불렀다.

공후인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니 일컬어 공후인이라 한다.

유리왕은 왕비송씨(宋氏)가 죽자, 골천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로 얻었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않자, 왕은 양곡(凉谷)의 동서에 두 궁을 짓고 각기 살게 하였다.

뒤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서 7일간을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는데,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 라고 꾸짖으니, 치희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황조가>를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몸은 뉘와 함께 살아볼까

 

 

을지문덕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에게 보낸 한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 전한다. 우중문이 3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을지문덕이 적장을 희롱하며 지어 보낸 시이다. 우중문이 이 시를 받자 때마침 피로하고 굶주린 군사들은 싸울 기력을 잃었다고 전한다.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깨우쳤네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싸움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이르노라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송시(頌詩).

 

어떤 전적에는 결루된 곳이 있기도 하고 전적간에 글자의 차이가 있기도 하여 시어를 고정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다. <태평송>은 주변국가를 모두 복속시켜 위세를 떨친 당나라의 위대한 문무의 힘과 통치력을 예찬한 내용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노린 신라의 야심적인 외교시이다.

大唐開洪業 대당(大唐)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巍巍皇猷昌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止戈戎衣定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修文繼百王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았도다.

統天崇雨施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理物體含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深仁諧日月 지극한 어지심은 일월과 짝하고

撫運邁時康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幡旗何赫赫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鉦鼓何鍠鍠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外夷違命者 명을 어기는 자 외방 오랑캐여

剪覆被天殃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淳風凝顯遍 순후한 풍속 곳곳에 두루 퍼지니

遐邇競呈祥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四時和玉燭 사철이 옥촉처럼 고르고

七曜巡萬方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維嶽降宰輔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維帝任忠良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五三成一德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을 이루니

昭我唐家皇 길이길이 빛나리라! 우리 당(唐)이여

 

 

《해가(海歌)》를

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창작 동기가 드러남

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근거-합리적 사고

여약패역불출헌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그물 : 포획의 매개체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의 한 정자에서 점심을 먹을 때 돌연 용이 나타나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을 바닷속으로 납치하였다. 공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한 노인이 지나다가 말하기를 "옛말에 뭇사람의 입길은 쇠도 녹인다 하였으니, 용인들 어찌 이를 두려워하지 않겠소. 모름지기 경내(境內)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면 부인을 찾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공이 《해가(海歌)》를 지어 뭇사람과 더불어 외치며 물가를 막대기로 치니 과연 용은 부인을 받들고 나타났다 한다

 

 

 

 

空門寂莫汝思家 절 안이 적막하니 집 생각이 간절하여

禮別雲居下九華 작별의 예 올리고 구화산을 내려가는구나

愛向竹欄騎竹馬 대나무 난간에 올라 죽마 타기는 좋아하지만

懶於金地聚金沙 금지에서 금모래 모으는 것은 싫어하는구나

添甁澗底休招月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달을 청하던 일도

烹茗甌中罷弄花 차를 달여 잔 속에 꽃을 띄우던 놀이도 그만 두려네

好去不須頻下淚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고 편안히 떠나려무나

老僧相伴有煙霞 노승은 안개와 놀을 벗 삼아 살리라

송동자하산 신라왕자 김지장스님은 / 동자승을 산아래로 내려보내며.

신라 시대의 왕자 김지장(金地藏)의 시. 《전당시(全唐詩)》 권808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장이 당나라 숙종(肅宗) 때에 중국 구화산(九華山)에 은거하여 지은 시로, 시의 내용은 “고국으로 돌아가면 오죽 좋으련만, 그렇다고 자주 눈물 흘릴 것 있느냐!”하는 것으로, 타국에서의 적막함과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면서도 체념한 채 노승과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그리고 있다. 자연 속에서 기거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는 시로서,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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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힐부득 과 달달박박 - 삼국유사 옮김

백월산(창원시 북면 백월산) 동남쪽 3000보쯤 되는 곳에 仙川村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살았다. 그들은 “... 속세의 얽힌 것을 풀어 버리고 무상의 도를 얻기로..” 하여 백월산 무등곡으로 출가하여 수양하는데 부득은 미륵을 구하고 박박은 미타를 염불하였다. 성덕왕 8년 己酉 4월 8일, 해가 질 무렵 박박의 北庵에 어여쁜 낭자가 사향냄새를 풍기며 찾아와 하룻밤 묵어 가기를 청하며 다음과 같이 “詞”(사-중국문장의 한 종류)를 지어 바쳤다.

行遲日落千山暮 행지일락천산모 걸음 늦고 해지니 온 산이 저물어

路隔城遙絶四隣 로격성요절사린 길은 멀고 마을도 멀어 사방이 끊어 졌소

今日欲投庵下宿 금일욕투암하숙 오늘 암자 아래에서 자고자 하오니

慈悲和尙莫生嚍 자비화상막생진 자비로운 화상께서는 성내지 마십시오

박박이 말하기를, 이 곳은 청정한 곳이라 여인을 들일 수 없소 하고는 문을 닫았다. 낭자는 다시 南庵으로가 부득에게 앞에서와 같이 청하며 한 “偈 (=誦)”를 올렸다.

日暮千山路(일모천산로) 해 저문 첩첩한 산 산길 가는데

行行絶四隣(행행절사린) 가도 가도 사방 인가 끊어졌다네

竹松陰轉邃(죽송음전수) 소나무 대의 그늘 더욱 깊건만

溪洞響猶新(계동향유신) 골짜기 냇물소리 새롭게 들려

乞宿非迷路(걸숙비미로) 자길 빔은 길을 잃은 때문 아니니

尊師欲指津(존사욕지진) 높은 스님 인도하기 위함이라네

願惟從我請(원유종아청) 바라건대 내 청만 들어주시고

且莫問何人(차막문하인) 누구냐고 묻지는 말아 주시오

부득이 불쌍하게 여겨 자리를 마련해주고 정신이 흐트러질까 열심히 염불을 외는데, 이 낭자 갑자기 産痛을 호소함으로 물을 끓여 이를 도왔다. 해산을 한 후, 낭자가 목욕 시켜주기를 청하는지라 또 더운 물로 몸을 씻어주니 갑자기 통 속의 물이 黃金液으로 변해지고 낭자가 목욕하기를 권하였다. 노힐부득이 마지못해 물에 몸을 담그자 향기가 진동하며 부득의 몸이 황금빛으로 변하면서 옆에 연꽃 좌대가 나타나자 낭자가 앉기를 권하며 “나는 관음보살이며 대사는 大菩提를 얻은 것이오”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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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王誡(화왕계)-薛聰(설총)

 

神文大王以仲夏之月(신문대왕이중하지월) : 신문대왕이 한여름에

處高明之室(처고명지실) : 높고 밝은 방에 있으면서

顧謂聰曰(고위총왈) : 설총을 돌아보아 말하기를

今日宿雨初歇(금일숙우초헐) :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薰風微凉(훈풍미량) : 더운 바람이 조금 시원하니

雖有珍饌哀音(수유진찬애음) :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不如高談善謔(부여고담선학) : 고상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우스개로

以舒伊鬱(이서이울) :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리라.

吾子必有異聞(오자필유이문) : 그대는 반드시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니

盍爲我陳之(합위아진지) : 어찌 나를 위하여 들려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聰曰(총왈) : 설총이 말하기를

唯臣聞昔花王之始來也(유신문석화왕지시래야) :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에 화왕이 처음 왔을 때

植之以香園(식지이향원) : 향기로운 꽃동산에 이를 심고

護之以翠幕(호지이취막) :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當三春而發艶(당삼춘이발염) : 봄날이 되어 요염하게 피어나

凌百花而獨出(릉백화이독출) :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於是自邇及遐(어시자이급하) :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艶艶之靈(염염지령) : 요염한 넋

夭夭之英(요요지영) : 어여쁜 꽃들이

無不奔走上謁(무불분주상알) : 빠짐없이 달려와서 뵈었는데

唯恐不及(유공불급) : 오직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忽有一佳人(홀유일가인) : 홀연히 한 미인이

朱顔玉齒(주안옥치) :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鮮粧靚服(선장정복) :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伶俜而來(령빙이래) : 간들간들 걸어 와서

綽約而前曰(작약이전왈) :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妾履雪白之沙汀(첩리설백지사정) :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對鏡淸之海(대경청지해) :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而沐春雨以去垢(이목춘우이거구) :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快淸風而自適(쾌청풍이자적) :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其名曰薔薇(기명왈장미) :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聞王之令德(문왕지령덕) :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期薦枕於香帷(기천침어향유) :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王其容我乎(왕기용아호) :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又有一丈夫(우유일장부) : 또 한 장부가

布衣韋帶(포의위대) :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戴白持杖(대백지장) :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龍鍾而步(용종이보) : 힘없는 걸음으로

傴僂而來曰(구루이래왈) :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僕在京城之外(복재경성지외) : “저는 서울 성밖의

居大道之旁 (居大道之旁 ) :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下臨蒼茫之野景(하임창망지야경) :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上倚嵯峨之山色(상의차아지산색) : 위로는 우뚝 솟은 산의 빛에 의지하고 있는데

其名曰白頭翁(기명왈백두옹) :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竊謂(절위) : 가만히 생각건대

左右供給雖足膏粱以充腸(좌우공급수족고량이충장) :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茶酒以淸神(다주이청신) :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巾衍儲藏(건연저장) : 상자 속에 가득 감추어두어도

須有良藥以補氣(수유양약이보기) : 반드시 좋은 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惡石以蠲毒(오석이견독) : 극약으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故曰(고왈) : 그러므로

雖有絲麻(수유사마) : 비록 생사와 삼베가 있다 해도

無棄菅蒯(무기관괴) : 왕골과 띠풀을 버리지 않아서

凡百君子(범백군자) : 모든 군자들은

無不代匱(무부대궤) :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不識王亦有意乎(부식왕역유의호) :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或曰(혹왈) : 어떤 이가 말하기를

二者之來(이자지래) : “두 명이 왔는데

何取何捨(하취하사) :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니

花王曰(화왕왈) : 화왕이

丈夫之言(장부지언) : “장부의 말도

亦有道理(역유도리) : 또한 일리가 있지만

而佳人難得(이가인난득) :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將如之何(장여지하) :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丈夫進而言曰(장부진이언왈) : 장부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吾謂王聰明識理義(오위왕총명식리의) :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故來焉耳(고래언이) : 그래서 왔을 뿐인데

今則非也(금칙비야) :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凡爲君者(범위군자) : 무릇 임금이 된 사람치고

鮮不親近邪侫(선부친근사녕) :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疏遠正直(소원정직) :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是以孟軻不遇以終身(시이맹가부우이종신) :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馮唐郞潛而皓首(풍당랑잠이호수) : 풍당은 낭서(郎署)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自古如此(자고여차) : 옛날부터 이러하였거늘

吾其柰何(오기내하) : ‘저인들 그것을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花王曰(화왕왈) : 화왕이

吾過矣吾過矣(오과의오과의) :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했습니다.”

於是王愁然作色曰(어시왕수연작색왈) : 이에 왕이 서운한 듯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子之寓言誠有深志(자지우언성유심지) :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請書之以謂王者之戒(청서지이위왕자지계) : 기록해두어 왕의 경계로 삼게 하라.” 하고

遂擢聰以高秩(수탁총이고질) : 마침내 설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설총이 지은 우언적인 글.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 실려있고, ≪동문선≫에서는 「주의 奏議」 편에 <풍왕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신문왕이 설총에게 울적한 심사를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을 때 설총이 왕에게 들려준 것이다. 화왕에게 장미와 할미꽃이 찾아와 각기 자신을 써달라고 청한다. 장미는 미모와 요염함을 내세워 임금을 곁에서 모시겠다고 청했고, 할미꽃은 서울 밖의 큰길 옆에 살면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살았음을 내세운다. 여기서 큰길(大道)은 할미꽃이 군자의 도리에 따라 살아온 자임을 자부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 할미꽃은 화왕이 비록 부족한 것이 없으나 좋은 약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극약으로 독을 제거하는 것도 필요함을 역설하여, 자신의 역할이 바로 약과 같은 것임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화왕이 장미에게 기울어지자, 할미꽃은 고래로 왕이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요망한 무리를 멀리한 예가 드물다고 항변하니 결국 화왕이 잘못을 시인하고 할미꽃을 받아드린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신문왕은 설총에게 그가 한 寓言이 깊은 뜻이 있으니 이 이야기를 적어 두어 왕자의 경계로 삼을 것을 청한다.

 

이 작품은 설총이 왕에게 치자(治者)의 도리를 직언하기보다 우언을 통해 암시하므로써 그의 유학정신과 문학성을 아울러 성취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장미를 요염한 여인으로, 할미꽃을 심성을 도야한 장부로 남성과 여성을 양극화시켜, 신라 통일 이후 남성우월의 지배원리가 강화된 유교적 원리가 엿보이며, 문학적으로는 후에 가전과 같은 의인문학의 새로운 문학적 표현영역을 개척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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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의 변천으로 보는 장자못 전설

구비문학이란

구비문학이란 대개 신화 전설 민담 민요로 구분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류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각기 지니고 있는 특징이 있으나, 본질에 의해 추출되었다기 보다는 전승적 측면에 의해 추출되었기 때문에 부수적인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질적인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에 도착하게 된다. 과연 여기서 본질적이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 답을 엘리아데가 말하는 모범이 되는 모델로 삼을 수 있다. 구비문학은 말로써 전해진 문학으로 이때까지 전승되었는데 왜 안 없어지고 전승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은 원형, 즉 모범이 되는 모델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 전설 민담 민요로 구분할 필요가 없이 모범이 되는 모델인 신화의 변이형태로 구비문학을 칭할 수 있다. 신화는 시간적 인식의 변화에 따라 원형적 시간인식에서 일회적 시간인식으로 바뀌었는데 그 때문에 전설 민담 민요로 변이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 과정을 장자못 전설을 통해서 논증하겠다.

 

장자못 전설의 기본형은 이렇다. 큰 못이 있다. 그 자리에 집터가 있다. 그 집에 인색한 시아버지와 착한 며느리가 산다. 어느날 도승이 찾아와서 시주를 요구한다. 시아버지는 거름을 준다. 며느리는 쌀을 준다. 도승이 며느리에게 따라오라고 한다. 무슨일이 있어도 뒤를 보지마라고 한다.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린다. 며느리를 놀라서 뒤를 돌아본다. 며느리를 그 순간 돌이 된다. 그 집이 못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언뜻 보면 재미난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이 속에는 신화적 요소가 들어있다. 먼저 제목에서 보면 장자못 전실이다. 장자란 긴장에 놈자자로 맏이란 뜻이다. 그래서 못이란 말을 더해 맏못이된다. 여기서 맏이란 지명으로 우리말을 살리기 때문에 차자표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말인 ,를 차자 표기한 것이다.  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는 대지의 중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이는 지명 마산에서도 나타나고, 혁거세신화의 계룡에서도 나타남으로 신화의 변이라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금기 즉 도승이 며느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금기는 무엇을 뜻하냐면 바로 과제이다. 과제는 입사식의 과정으로 이 과제를 통과해야 인식적인 탄생을 하게되는 것이다. 며느리는 입사식을 통과하여 돌이 되는데 이는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돌로써 인식적인 탄생을 뜻하는 것이다.

인물관계에서도 신화 요소가 보인다. 장자못 전설에서 나오는 인물은 시아버지, 도승, 며느리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반대되는 성격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혼돈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혼돈은 카오스로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코스모스 즉 질서로 가는 한 과정으로 보아서 긍정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신화에서 주인공이 인식하기 이 전의 상태를 뜻하며 나중에 며느리가 인식적 탄생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도승에게 거름을 주는데 이는 구질서를 나타낸다. 거름은 ,로 중심을 뜻하나 여기선 돌려보내야 할 묵은 질서로 보인다. 왜냐하면 며느리는 쌀을 시주함으로 ,를 표현하기 위해 쓴 말인데 ,는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 며느리가 나중에 돌로 인식적 탄생을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승은 ,,로 질서를 아는자 초자연적 존재로 며느리에게 금기를 제시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구비문학은 고대의 원형적 시간 개념에 따라 천지창조를 채현하고자 한 이야기인 신화를 일회적 시간 인식에 따른 변이형태와 구비라는 특성에 맞춰 지역별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승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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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작가의 생애와 시세계

작가 소개

 

오장환
오장환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가담했던 오장환시인은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오장환은 말이 없고 조요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이나 대신 귀염성 있고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회인 공립보통학교 입학, 안성 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했다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오장환시인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지용시인에게서 시를 배웠다. 휘문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화염과 같은 시를 발표하고,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어려서 박두진시인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일본 지산중학에 유학하고 온 뒤부터는 서정주, 김광균, 이육사시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1937년에 첫 번째 시집 성벽, 1939년에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내고 난 뒤에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서정주 시인은 전한다. 일제말기 단 한 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둡고 궁핍한 시기를 견딘 오장환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집 병든서울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르는 등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절정의 노래」는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일제말기 단 한 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둡고 궁핍한 시기를 견딘 오장환 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오장환시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길 바라며 지방으로 문화선전활동을 다니며 시낭송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테러를 당해 치료할 곳을 찾아 남포로 갔고 거기서도 치료를 할 수 없어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그리고 6.25전쟁의 와중에 치료를 받지 못한 채 34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

 

그의 시가 1930년대 시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생명파류의 시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라기보다 이용악, 백석 등과 함께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리얼리즘 시를 통해서이다.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은 생명파에 속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주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 점이 오장환을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리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오장환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이후 그의 시편에 고스란히 녹아 예술적 성취의 밑거름이 되었다.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

 

1. 오장환의 문학

 

오장환은 1930년대부터 1951년까지 문단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 전에 성벽(1937) 헌사(1939) 등 두권의 시집을 냈고, 해방 후에도 병든서울(1946) 나사는곳(1947) 붉은기(1950) 등 3권의 시집과 번역 시집인 에써닌 시집, 산문집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간했다. 그 외에도 장시 전쟁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도 44편이나 되는 동시와 조선 시에 있어서의 상징, 소월시의 특성과 같은 주목할 만한 평론을 포함한 22편의 산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성벽(1937) 헌사(1939)는 오장환의 이름을 1930년대 우리 시문학사에 확실하게 새개놓은 시집이었다. 해방 후 에 펴낸 병든서울(1946) 나사는곳(1947) 은 오장환 시의 새로운 개성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병든서울은 해방 직후의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있다.

김동석은 해방 후 시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 시만치 시대를 잘 읊은 시는 없으리라고 했다. 병든 서울이 당시 주목받았던 이유는 도식적 구호를 앞세워 무조건적으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계몽하는 창원이 아니라, 자기비판을 통한 진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있다.

 

비판적 리얼리즘 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로 변모해간 해방 후의 그의 시는 1947년 후반 테러를 피해 북으로 도피하면서 분단 이후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북에서는 1953년 박헌영 간첩사건의 일환으로 임화, 김남천 등 월북 문인들이 부르주아 미학 잔재에 대한 비판을 받으며 숙청되었는데 오장환은 이 논쟁 전인 1951년 전쟁 직후에 병사하였지만 임화 계열의 문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인지 그 이후 북한묵학사에서는 단한 줄도 언급 되지 않는 문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남과 북의 문학사 모두에서 오장환의 문학은 지워지고 매몰되었다.

 

2. 반제 반봉건의식 및 식민지 근대도시 비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오장환 시가 첫 시집 성벽에서 전통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장환의 시는 전통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장환은 전통 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를 쓰기 이전에 동시를 썼고, 현대적 감각의 아포리즘 시를 썼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장시를 썼다. 오장환의 시는 리얼리즘 시가 많다.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은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시 전쟁에서 발견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전쟁은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 과녁도 없는 이미지들을 순서없이 나열한 작품이 아니다. 전쟁은 반전, 반제국주의, 인간존중, 생명존중을 주제로 하는 시이다.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반전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오장환은 전쟁 반대에 대한 자기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시를 썼다.

戰爭

-銃이 웃는 것은, 自身이 詩人이기 때문이다.

(중략)... ...

輕氣球를 높이 0中에 꼬지라.

薇(微)笑는 歷史를 모르고,

눈물은 고인 적이 없다.

戰爭이란 動物은 反芻하는 재조를 가젓다.

 

두 번째는 이런 시들을 쓰면서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성벽, 성씨보, 정문, 종가 등이 시를 썼다. 유교 이데올로기로 지탱하는 봉건적 사회 질서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가 정문이다. 오장환의 시는 단순히 전통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반전 반제국주의, 식민지 근대도시 비판과 봉건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 성씨보를 시작으로 성벽, 정문, 종가 등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반봉건의식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일청인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오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서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라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 오장환, 성씨보, 조선일보(1934)

이 시에서 화자는 족보나 성씨 가계보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한다. 이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나 불만은 작가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꼭 거기에 한정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이다. 장시 수부는 자본주의화 하는 식민지 근대도시 서울에 대한 비판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는 시다. 첫 시집 성벽이 출간되기 전인 1936년 11월에 발표한 장시 수부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시의 전반부는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주로 비판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상층계급의 가식적이고 부패한 삶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1930년대 수도 서울이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근대성의 비극이 집약된 곳임을 파헤치려고 하였다.

 

수부(首 府)

-수부는 비만하였다.신사와 같이

1.

수부의 화장터는 번성하였다.

산마루턱에 드높은 굴뚝을 세우고

자그르르 기름이 튀는 소리

시체가 타오르는 타오르는 끄름은 맑은 하늘을 어지러놓는다.

시민들은 기계와 무감각을 가장 즐기어한다.

금빛 금빛 금빛 금빛 교착(交錯)되는 영구차.

호화로운 울음소리에 영구차는 몰리어오고 쫓겨간다.

번잡을 존숭(尊崇)하는 수부의 생명

화장장이 앉은 황천고개와 같은 언덕 밑으로 시가도(市街圖)는

나래를 펼쳤다.

(중략)... ...

11.

수부는 지도 속에 한낱 화농된 오점이었다

숙란하여가는 수부-

수부의 대확장- 인근 읍의 편입

― 오장환, 수부

'강렬한 이미지의 게릴라식 몽타주로 그대 조선의 자본주의 일상을 누와르 필름처럼 펼쳐놓은 오장환의 수부는 야생의 직관으로 번뜩인다. 생것의 감각인 직관의 통찰이다. 이는 오장환이 아방가르드와 통한다면 관습과 규율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언어사용방식과 직관의 감각 때문이다.

 

3. 농촌현실에 대한 연민

당대 농촌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모촌과 북방의 길은 오장환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식민지 지배하의 농촌현실과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추레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라불던 밤. 지붕 밑 양주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추레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 오장환, 모촌

모촌의 썩어가는 추녀는 당대 조선 농민의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모촌은 저물어가는 농촌이면서 기울고 있는 민족 현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저물어간 뒤에 곧 어둠이 올 것임을 암시한다.

 

4. 오장환 시의 귀향의식과 모성지향성

오장환 시에 나타나는 귀향의식과 모성지향성은 고향을 떠나온 탈향과 방황의 시기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라 오장환 시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장환 문학의 밑바탕이 된 것이 인간을 위한 문학이라는 그의 문학관이다. 인간을 위한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오장환의 삶과 문학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장환은 자기가 처한 현실이 인간적인가 질문하였다. 인간을 위한 제도이며 체제로 존재하는가 물어보았다. 아니다 싶으면 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고 그것을 새로운 문학으로 표현하였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찾아 떠나던 모색의 길이 그의 삶의 행로가 되었고 문학적 여정이 되었다. 고향에서 시작하여 고향을 떠났다 다시 귀향을 선택하는 시적 행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근대도시를 떠나 항구와 바다를 찾아갔고 방황하였지만 끝내 그 바다와 동화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은 곧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어머니와 같이 늙고 힘없고 쇠약한 동네사람들의 팍팍한 생존의 터전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공간적 도피이거나 전원생활을 예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땀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오장환 시에 나타나는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이 시기만의 특징이 아니다. 이런 시는 동시에부터 붉은 기를 포한하여 다섯 권의 시집 모두에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루루루

두루루루

가는 맷돌은

빈대떡 부치려고 가는 매.

내일은 내 생일.

두루루루

두루루루

엄마는 한나절 맷돌을 간다.

― 오장환 내생일

 

오장환이 십 대 후반에 TMs 이 동시에는 내일이 자기 생일이라서 오늘 한나절 맷돌을 갈며 빈대떡 부칠 준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의 들뜨고 기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십 대에 동시를 쓸 때부터 시의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 쓴 시 남포병원과 붉은 기에 수록된 연가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다.

 

5.중도적 주인공과 비판적 리얼리즘 시

해방 후에 그가 쓴 시들은 모두 사회주의에 경도된 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 아니다. 병든 서울에 수록된 많은 시의 화자는 이른바 중도적 주인공이다. 비판적의식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인물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울음뿐이다.

몇 사람 귀 기울이는 데에 팔리어

나는 울음을 일삼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늦었다.

나의 갈 길,

우리들의 가는 길,

그것이 무엇인 줄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하는 물음에 나의 대답은 또 늦었다.

― 오장환 나의길

 

 

나의 갈길, 우리들의 가는 길이 무엇인 줄은 안다. 이미 반제 반봉건 반자본주의의 길이요 인민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는 길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서 주저한다. 그러다 또 대답이 늦어지고 실천이 늦어진다. 그래서 자학적인 울음을 운다.

병든 서울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적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움직이는 시가 아니라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라는 뜻이된다. 병든 서울에 실린 대부분의 시, 1946년까지 쓴 많은 시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중략)... ...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오장환 병든서울

 

해방기 현실을 바라보는 창작 주체의 주관적 심경이 이처럼 강렬하게 표출된 시는 드물다. 지나친 주관성의 함몰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진솔하게 자신의 내면 심리를 표출해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는 중도적 주인공이나 문제적 개인보다는 적극적 인식과 실천력을 갖춘 긍정적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긍정적 주인공은 개인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집단전 인물의 움직임 속에서 나타난다. 오장환의 시는 1946년 9월 철도총파없과 10월 항쟁을 기점으로 하여 1947년으로 가면서 서서히 비판적 리얼리즘 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로 변모되어간다.

 

6.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

오장환은 식민지 사회에 대한 분명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던 시인이다. 현실에 대한 그의 문학적 관심은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 농촌현실에 대한 연민 귀향의식, 비판적 리얼리즘이다. 그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주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것 또한 오장환의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시집에 따라 변모하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일관성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작품이든 그것이 인간을 위한 문학이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시로 표현한 반전, 반제국주의 반봉건의식, 인간존중 사상과 근대 도시비판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시나 해방 이후의 리얼리즘 시도 인간을 위한 문학이었다.

오장환 시의 밑바탕이 된 시대정신은 반제국주의 반봉건, 반식민지 근대화 사상이었다. 개인적인 콤플렉스나 가정적인 이유 때문에 시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시이 밑바탕이 되어 변화해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한 편의 친일시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피지배자인 농민에 대한 관심과 식민지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농촌에서 쫓겨나고 힘겹게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문학을 통해 고향 사람들 편에 서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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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정리4

김유정 따라지 목숨 = 소낙비 됨. 따리지 인생이 많다. 따라지 열전이다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다. 떠돌이 농민이다. 주인공 부부는 빚때문에 야반도주를 했다. 매춘을 다루고있는 것을 일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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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설론

양반전

 

 

강원도 정선 고을에 가난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이 양반은 평생을 글만 읽어 온 왔기 때문에 쌀을 제 손으로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관아에서 쌀을 빌려 먹었는데, 그 것이 천 석이 넘었다. 정선 고을에 시찰을 나온 관찰사가 이 사실을 알고 양반에게 당장 천 석을 갚으라고 했으나, 갚지 못한 양반을 감옥에 가두라는 명을 군수에게 내린다. 이 양반은 고을에서 성품이 어질기로 명성이 자자해 새로운 군수가 부임 시 그를 먼저 찾아보는 관례가 있던 터라, 명을 받은 군수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이 지경에 양반은 밤낮으로 울기만 할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양반에게 평생 글만 읽으면서 양반의 도리만 중시하더니 양반이 한푼의 값어치도 못된다고 비난한다.

 

그 마을에 문벌 없는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부자는 양반을 아무리 가난해도 항상 존귀하고 영화스러운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고 자신은 신분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비천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자는 양반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양반의 천 석 빚을 갚아 주고 대신 양반 신분을 사기로 제안한다. 양반은 몹시 기뻐하며 제안을 승낙한다.

군수는 양반이 빚을 다 갚는다는 소리에 영문을 묻는다. 군수는 중재를 위해 양반 신분을 사고팔자면 증서가 있어야 한다며, 고을 백성들을 불러 모아 증인을 세우고 증서를 작성했다. 군수는 부자를 오른편 높직한 자리에 앉히고 양반은 뜰 밑에 세워 놓고 양반 증서를 읽었다. 그 증서에는 양반이 지켜야할 도리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너무 많아서 부자는 싫어한다. 그래서 군수에게 양반의 특권을 문서에 적어 달라고 한다.

 

군수는 추가로 양반의 특권을 증서에 적어준다. 그 내용은 어진 백성을 상대로 강도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이 양반을 공짜를 좋아하고 아첨만 하는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부자는 양반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양반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양반

강원도 정선에 사는 가난한 양반으로 천 석이나 되는 관곡을 꾸어다 먹고는 갚지 못해 양반 신분을 판다. 글 읽기만 좋아할 뿐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양반이라는 이유로 많은 혜택을 받는 조선 시대 양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추지 못하는 조선 후기 양반의 전형으로 가장 날카로운 풍자의 대상이다.

 

양반의 아내

허울뿐인 양반의 권위를 부정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남편의 무능력을 원망하며 닦달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자

부를 쌓은 평민으로 조선 후기 새롭게 등장한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다. 평소 동경하던 양반이 되기 위해 천 석이나 되는 관곡을 양반 대신 갚고 양반 신분을 산다. 그러나 양반의 허례허식뿐인 생활 규범과 횡포에 양반의 한계를 느낀다. 가식이 없는 인물로 자기 분수에 맞는 삶을 살고자 천 석 재산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군수

지극히 위선적인 양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양반의 천 석 빚을 대신 갚은 부자가 양반 신분을 취득하려는 것을, 양반 매매 증서를 써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방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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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설론

운영전 줄거리

 

조선 때 선비 유영은 궁에 혼자 놀러갔다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니 선비와 절세미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안평 대군 때 사람으로 궁녀 운영과 김 진사로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유영이 예를 갖추자, 그를 보며 경개여구라는 말을 하며, 운영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했고 김 진사는 운영의 이야기를 책에다 받아 적었다.

 

세종대왕의 아들 중에서 가장 영특한 안평 대군은 열세 살에 궁궐을 나와 수성궁에서 지냈다. 대군은 책 읽고 시 짓는 것을 즐겼다. 그 실력은 당대 유명한 문인들보다도 뛰어났다. 종종 수성궁에 이름난 문장가와 선비를 불렀다. 어느 날 궁녀 열 명을 뽑아 학문을 가르치고 시를 짓게 했다. 하지만 이들을 궁 안에서 지내게하고 궁 내외에 비밀로 부쳤다.

 

한 날 안평대군이 궁녀들을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 중 운영의 시를 보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시라고 말하며, 그리운 임이 누구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운영은 대군에게 그리운 임이 없다고 고했다. 열 궁녀 중 한명인 자연은 운영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음을 눈치 채고 물었다. 운영은 임이 지난 가을 수성궁을 방문했던 젊은 선비 김 진사라고 실토한다.

 

김 진사는 처음 수성궁에 방문한 이후 종종 안평 대군의 부름을 받아 수성궁에 오게 되었는데, 운영은 그때를 기다리며, 그를 그리는 마음을 담은 시와 금비녀 한 쌍을 지니고 다녔다. 그를 다시 본 때에 남몰래 전했다. 운영의 마음을 안 김 진사는 바로 답장을 보내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궁을 출입하지 못해, 수성궁에 드나드는 무녀를 통해 운영에게 답장을 전했다. 김 진사의 마음을 확인한 운영은 그를 잊지 못했고 그리움이 시에 드러난 것이였다.

 

하루는 안평 대군은 한 곳에서 지내던 열 명의 궁녀 중 운영을 포함한 다섯 명을 서궁으로 옮게 지내게 했다. 운영은 김 진사에게 답장을 전할 길이 없어 애를 태웠고 한가위 무렵 궁 밖으로 빨래를 하러 나갈 일이 생겼다. 이 때 운영은 다른 궁녀의 도움으로 무녀의 집에서

 

김 진사를 만나고 김 진사와 서궁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김 진사는 자신의 종인 특의 귀한 버선 덕에 궁궐의 담을 넘을 수 있었고, 그 뒤로 밤마다 담을 넘어 운영을 만났다. 이런 날이 계속되자 김 진사의 종인 특은 김 진사에게 운영을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를 권하는데, 이는 운영의 재물을 자신이 차지하기 위한 술수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운영과 김 진사는 특의 말을 따라 궁을 나서기를 계획했다. 운영은 재물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운영의 집이 아니라 특의 집에 둔다. 운영은 궁을 빠져나갈 계획을 친한 자연에게 말하는데, 자연은 운영에게 궁을 몰래 도망치는 것보다는 병에 걸려 자연스럽게 나가는 것을 추천하고 운영은 자연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며칠 후 안평 대군은 다시 궁녀들에게 시를 짓게했다. 운영의 시에서 또 김 진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대군은 그리운 임이 김 진사가 아니냐고 질문한다. 운영은 결백을 주장하며 목을 메었는데, 안평 대군이 목을 메는 모습보고 결백함을 인정해 목숨을 건진다.

 

이 날 후 운영은 김 진사에게 이별을 말했다. 특은 김 진사가 슬픔에 빠진 틈을 노려, 운영의재산을 도둑을 맞았다며 김 진사에게 거짓을 고한다. 김 진사는 처음에는 특의 말을 믿었지만 나중에 거짓임을 알고 특을 나무란다. 특은 화나가서 운영과 김 진사가 사랑하는 사이임을 소문을 낸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안평 대군의 귀에 들어갔다.

소문을 들은 안평대군은 궁의 열 궁녀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운영은 자기 때문에 다른 궁녀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목을 메어 자결한다.

 

김 진사는 운영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운영을 넋을 기리기 위해 그나마 믿음이 큰 특을 다시 불러 돈을 주어 불공을 드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특은 이번에도 김 진사를 속이고 돈을 가로챘다. 김 진사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김 진사는 직접 부처님께 운영의 명복과, 특이를 벌하는 불공을 드린다.

그 후 특이는 7일 만에 죽고, 김 진사는 특이가 죽은 후 4일간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집에서 누워서 죽었다.

김생은 여기까지 적고 붓을 던지며 운영과 붙들고 울었다. 날이 밝자 그들은 자취를 감추고 책만 남았는데 이것이 운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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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성전(張翼星傳) 줄거리 작자미상

●요약  작자 연대 미상의 한글 소설의 하나. 지은이와 지은 때는 자세하지 않으며 군담(軍談) 소설의 일반적인 유형을 따른 작품으로, 중국 송나라를 배경으로 장익성이 떠돌아다니며 고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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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형성비평 고은 「그 석굴 소년」 줄거리 및 해석

 

1. 신화형성비평이란?

근본적으로 역사적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화적 패턴 또는 원형(archetype)을 문학작품 속에 구체화한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현대비평에서 ‘신화(myth)’라는 용어의 적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화는 문학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흔히 신화비평가들은 거의 모든 문학 장르와 개별적인 문학작품들을 어떤 원형(原型)이나 본질적인 신화적 공식의 재현으로 해석한다.

원형적 비평이라고도 불리며, 프라이저(Frazer), 프라이(Frye) 등에 의해서 연구되어진 비평 태도이다. 이 비평은 각각의 작품에 대한 독자적인 가치 평가 중시, 작품의 잔기(殘基)와 감동을 중시하는 인상비평 배척, 작품상호 간의 질서를 찾는 그림화 작업이라는 세 가지를 전제로 한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우연적ㆍ부속적ㆍ지엽적인 구성요소를 제거하고 다른 작품 신화에서 원형을 찾아내어 그것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신화비평은 역사적ㆍ문화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라 비판받기도 한다.

 

2. 작가, 작품소개

본명은 은태(銀泰),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 출생하였고, 군산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휴학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대학에서 시를 강의하고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1974년 제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후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석굴 소년」은 고은의 『만인보』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고은의 『만인보』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방대한 인물 서사의 새로운 시적 지평을 확장시킨 성과를 거두었다는 문학적 주목을 받았다. 「그 석굴 소년」은 서사의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이 역동적이고, 신화적 이미지가 선명하게 발현되어 있다.

 

3. 「그 석굴 소년」의 신화적 분석

 

3-1) 신화적 서사구조

「그 석굴 소년」은 ‘탄생-떠남(쫓겨남)-시련/관문-회귀-신세계 창조’의 영웅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고은은 이러한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만인보』의 역사적 진실을 구현하려 한다. 「그 석굴 소년」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그 석굴 소년」은 영웅서사 구조를 지니지만 일반적인 구조와는 그 형태를 약간 달리한다.

시련과 관문 이후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설정(해당 시에서는 잃어버린 자기를 다시 찾는 서사구조)은 동일하나, ‘회귀’와 ‘신세계 창조’라는 변형을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당 인물, 즉 ‘기표’가 죽어도 그 ‘기의’는 다시 살아나 “새로움의 낯익음/낯익은 새로움”을 형성한다는 순환론적 인식이다. 여기서 기의는 인물의 넋 또는 혼을 말한다. 신화적 상상력은 이러한 인식의 뿌리가 된다.

 

1)

금빛 불빛 낙조 파도 총궐기에

에워싸인 섬

이제 막

숨쉬는 섬

울릉도

그 울릉도 태하석굴

낙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어느새 소년이었다

신들려 밤에는 별들과 이야기하고

바람소리 잠들면 귀신들과 사귀었다

―「그 석굴 소년」 4연∼5연

 

2)

귀신들린 놈이라고

미친놈이라고

소년은 끝내 마을에서 버림받았다

아버지는 소년을 자주 때렸다

한밤중 돌아와

작대기로 잠든 소년을 때렸다

집 안에 귀신을 둘 수 없다고

끝내 소년은 쫓겨났다

―「그 석굴 소년」 7연∼8연

 

3)

꿈속에서 세상 떠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꿈속에서

누워 있는 수레를 일으켜세웠다

생전의 검은 수염이

꿈속에서 하얀 수염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어서 저 위 석굴로 들어가거라

거기가 네 세상이다

―「그 석굴 소년」 10연∼11연

 

1)~3)에서는 소년의 탄생에서부터 신화적·영웅적 연대기가 전개된다. 1) 에서는 소년 수레가 ‘금빛 불빛 낙조 파도 총궐기에/ 에워싸인 섬’이자 ‘숨쉬는 섬’인 울릉도의 태하석굴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비범한 영웅의 탄생을 시사한다.

 

2)에서는 평범한 인물(마을 사람들, 아버지)들과 다른 면모를 지닌 소년이 서로 충돌한다. 이것은 영웅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 속의 특별한 인물은 사회에서 고비를 맞게 된다.

 

3)에서는 ‘세상 떠난 할아버지’를 통해 ‘석굴’이 소년 수레의 세상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정신적 스승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정신적 스승’은 꿈과 신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원형 중 하나로, 영웅에게 필요한 동기· 영감길잡이·훈련권능을 제공한다. 캠벨은 이러한 인물을 ‘현로’라 이름한 바 있다.

 

3-2)‘석굴’의 신화적 공간 의미

소년 수레는 석굴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 다음에는 두 발로 걸었다

박쥐들이 날아올랐다

누군가가 이끌 듯이 수레는 들어갔다

어떤 무서움도 불안도 없었다

새로움의 낯익음

낯익음의 새로움

―「그 석굴 소년」 15연

 

동굴이나 석굴과 같이 ‘자궁’을 형상화하는 근원적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은 쉼, 심신의 안정, 회귀와 같은 이미지를 나타낸다. ‘태하 석굴’에서 태어난 소년이 다시 석굴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이러한 원형회귀의 개념이다.

「그 석굴 소년」 서사의 중심 공간은 ‘태하 석굴’이다. 주인공은 귀신들린 놈 취급을 받아 움막으로 쫓겨났을 때, 꿈속에서 정신적 스승인 할아버지를 만나 ‘석굴’로 인도된다. 현실 공간인 ‘마을과 움막’에서 초월적 공간인 ‘석굴’로의 이동이다. 석굴로의 이동은 공간의 이동과 변화를 의미하는 한편, 뒤이어 소년의 성장 서사가 시작될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석굴’은 ‘소년 수레’가 태어난 장소이자 자궁의 원형이다. 운명에 따라 석굴로 진입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자신으로 재 탄생한다는 것이 「그 석굴 소년」에서 ‘석굴’의 신화적 의미라 할 수 있다.

 

4.결론

신화형성비평적 관점에서 고은의 「그 석굴 소년」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에 주목할 수 있었다.

첫째는 영웅 신화적 서사 구조다. 주인공 ‘소년 수레’는 『만인보』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전승자로서 서사화되어 있으며, 영원한 생명성을 지닌 영웅으로 그려졌다. 때문에 「그 석굴 소년」은 ‘탄생- 떠남(쫓겨남)-관문/시련-회귀-탄생’이라는 영웅서사의 구조적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신화 원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회귀’와 ‘신세계 창조’라는 변형을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동양적 일원론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다.

둘째는 석굴의 상징성이다. 주인공은 현실적 공간인 ‘집과 마을’에서 쫓겨나 현존과 실존을 아우르는 신비한 공간인 ‘석굴’로 진입한다. 여기서 ‘석굴’은 자궁의 원형이자 주인공이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또한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비범한 능력을 얻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궁’이자 ‘영웅의 재탄생 공간’이 「그 석굴 소년」에서 ‘석굴’의 신화적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 석굴 소년」은 이러한 주인공의 영웅 서사화 과정, 그리고 ‘석굴’의 신화적 공간 인식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일원론적 관점과 더불어 순환과 회귀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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