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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역 요산 김정한의 수라도 줄거리

 

< 목차 >

1. 작가의 약력

2. 작가 소개

3. <수라도> 읽기

4. <수라도>에 나타나는 노인과 역사성

5. <수라도> 속 ‘미륵당’

 

1. 작가의 약력

호는 요산(樂山). 경상남도 동래(지금의 부산광역시) 출생. 어려서 서당에 다니다가 1923년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다음해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1928년 졸업 후, 울산 대현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한편 『조선시단』에 「구제사업」이란 단편을 기고하였다가 작품 제목만 살리고 내용은 전문 삭제를 당하였다.

1932년에 귀국, 양산(梁山)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 1933년남해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36년에 단편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소설 「옥심이」·「항진기(抗進記)」·「기로(岐路)」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그 일에 관여하였다가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경찰에 피검되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붓을 꺾었다. 광복 후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이후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1966년 단편소설 「모래톱이야기」 발표를 계기로 중앙문단에 복귀하고, 이후 5년 동안 낙동강변의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암담한 일제치하와 그 이후 핍박당하는 농촌현실을 폭로하는 소설을 썼다.

5·16 직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과 칼럼을 집필하는 한편 1967년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부산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다시 부산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1974년 정년퇴직하였고, 그 뒤 1987년 민족문학학회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고, 1971년「산거족(山居族)」으로 제3회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2. 작가 소개

김정한은 1936년 ‘사하촌’으로 문단에 나왔으나 1940년대 이후에는 거의 절필 상태로 지냈다. 25년 동안 창작을 중단하였기 때문에 세간의 이목도 줄어들고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환갑을 앞 둔 59세에 ‘모래톱 이야기’를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후 ‘수라도’, ‘인간단지’, ‘산거족’ 등의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음으로써 요산의 문단 복귀는 문학사적 사건이 되었다. 김정한이 오랜 절필 끝에 작품 활동을 재개한 것은 순수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던 당대 문단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정한은 25년 절필 이전까지는 그렇게 관심을 끄는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나긴 절필이 끝나고 문단에 복귀했을 때 그것은 사건이었다. 60년대 말기의 정치적 상황이나 문단 상황은 그 주체는 달랐다고 해도 30년대나 다름이 없는 억압적 상황이었고 군부독재가 자리잡고 있던 시기라 현실을 고발하는 과감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작가는 없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60년대 후반기 새로운 리얼리즘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발표된 요산의 작품은 작가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었던 작품이었다. 이후의 작품들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되어 가는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산업화로 인해 인간성이 왜곡되고 타락해가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작품들이었다. 요산 김정한은 일생을 반식민, 반독재인 반골의 삶을 살았기에 정치가들의 경계 대상이었으나, 문단과 사회로부터는 늘 깊은 존경을 받는 작가였다.

 

3-1. <수라도> 개괄

김정한의 유일한 중편 소설이자 제 6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그의 후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960년대 초반, 5.16 군사정변으로 그 가치가 희박해지면서 문학의 현실적 기능도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군사 정권 치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로 가득했던 문학들로 인해 당시의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1966년 김정한의 문단 복귀와 ‘수라도’의 창작은 해방 전후에 걸쳐 여전히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농촌과 시대의 현실을 몸소 체험한 결과였다. <수라도>는 낙동강 연안의 농촌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이야기는 가야부인의 임종을 지켜보며 손녀 분이가 할머니 생애의 여러 사건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의 지조를 견지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가야 부인의 일생이 담겨져 있다.

그녀는 한 가문의 수난을 온몸으로 감당해 내는 인고(忍苦)의 표상이며, 불도에 귀의함으로써 굴절 많은 생애를 마감하는 한국적 여인상이다. 그러나 가야부인의 인고의 삶이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 속에 닫혀 있지 않다는 점에 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 즉 그녀는 일제의 강압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의지적 여인상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살필 수 있는 전통적인 덕목이 일제와의 투쟁에서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 「수라도」는 비극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망이나 체념과 같은 비관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다. 그녀의 삶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주체적 성장을 계속하며 새로운 시기를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3-2. <수라도> 줄거리

분이는 가야부인의 손녀이다. 분이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할머니의 젊은 시절의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분이는 할머니를 따라서 미륵당에 자주 가곤 했다. 할머니는 늘 의젓하고 깨끗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야부인을 존경하였다. 가야부인이 땅에 묻힌 미륵석불을 발견하여 이 미륵당을 짓게 했기 때문이었지만, 분이가 할머니를 따르는 이유는 할머니의 생애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부인과 그녀의 시댁은 많은 수난을 겪어왔었다.

  가야부인이 시집 온 후 집안의 첫번째 수난은 시할아버지 허진사의 죽음이다. 허진사는 일제가 주는 합방 은사금을 거부하고 서간도로 갔지만, “무슨 강습소를 꾸몄다든가 독립 운동을 했다.”라는 명목으로 죽어서 돌아오게 된다. 그 다음해에 삼일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손아래 시숙인 밀양 양반이 일제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생겼다. 이것이 이 집안의 두번째 수난이었다.

그런 사정 속에서 종들도 내보내고 손수 모를 내고 길쌈도 하며 허둥거리며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고, 가야부인은 육 남매의 어머니이고 자부도 거느린 시어머니가 되었다. 그 무렵 그녀는 시어머니가 시아버지 모르게 천수경을 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할아버지 허진사의 입젯날 장을 보고 돌아오다가 쉬던 자리에서 가야부인은 돌부처의 정수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시어머니에게 절을 세우자고 말을 하였지만 오봉선생이 반대한다.

오봉의 반대로 끙끙 앓던 가야부인은 몰래 괴질로 죽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은 고명딸의 시체를 화장하였고, 그녀의 사위인 박서방의 도움을 받아 절을 짓기로 한다. 그렇게 가야부인이 집을 나와 사위의 집에 살면서 절을 짓는 동안, 그녀의 시아버지인 오봉이 한산도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국에 갇힌다. 삼 년 집행유예의 형을 받은 시아버지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죽게 된다. 이 죽음이 그녀가 시집온 이후의 허씨 가문의 세번째 비극이었다.

오봉의 장례식에 참예한 창원 김진사는 창씨개명한 이와모토 참봉에게 욕을 하고, 오봉을 죽인 것은 고등계 경부보인 이와모토의 아들이라고 질타한다. 이에 속이 상한 이와모토는 병이 들었고, 이를 오봉의 혼신 때문이라고 여긴 그의 집안에서는 천금새라는 무당을 시켜서 굿을 하였다. 자신의 신당 근처에 절을 짓던 가야부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졌던 천금새는 절을 해하고자 하는 굿을 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이와모토 참봉은 죽고, 굿에 실패한 천금새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없어지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사람 공출이 시작되었다. 이와모토 참봉의 조카였던 이와모토 구장의 주도하에 남자들은 탄광과 전장으로, 처녀들은 공장과 위안부로 끌려갔다. 가야부인의 몸종인 열 아홉 살 난 옥이가 영장을 받게 되었다. 옥이는 끌려가던 날 박서방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날 밤 이와모토 구장이 벼랑 끝 강물에 시체가 되어 떠 있는 채로 발견된다.

  해방이 되었고 독립정부가 세워졌지만 별로 변한 것은 없었다. 징병을 피해 도주하였던 가야부인의 막내아들 석이가 돌아왔으나 농민조합을 만드니 마니 하면서 돌아다니기만 한다. 그녀의 남편은 통일되지 못한 것만 한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모토 참봉집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일제시에 경부보를 지냈던 맏아들이 경찰간부가 되고 곧이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가야부인은 내색하지 않지만 어느덧 시어머니와 같이 천수를 읊으며 지낸다. 임종이 가까워진 가야부인은 침상에 누워 가끔씩 눈을 떠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전쟁의 포성을 들으며 세상을 하직한다.

 

3-3. 작품 해석

‘수라도’는 가장 먼저 소복 차림의 보살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오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단지 가야 부인의 임종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가야 부인의 일생에 깊은 내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시작과 끝이 가야부인의 임종 장면, 본문 부분이 손녀인 분이가 가야 부인의 행적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야부인이 시집 온 후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이 시할아버지 허진사의 죽음이다. 허진사는 일제가 주는 합방은사금을 거부하고 서간도로 가서 “무슨 강습소를 꾸몄다든가 독립 운동을 한” 명목으로 죽어 돌아오게 된다. 그 후 3.1 만세운동 사건 때 손아래 시숙인 밀양 양반이 일제의 총에 죽음을 당하게 되며, 다음으로 시아버지 오봉 선생이 소위 ‘한산도 사건’으로 일제의 누명을 입고 형을 살고 나온 후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 두 사건은 간단히 소개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오봉 선생이 겪은 일은 가야 부인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으로 인해 훨씬 현실감 있고 구체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합방 이후 낙동강 연안 일대의 질펀한 갈밭들이 모두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세상을 등진 듯 새침하게” 세월을 보낸다. 오봉 선생은 스스로 세상을 멀리하고 고서들을 뒤적거리거나 가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름을 달래는, 전통적인 유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유생들이 한산도에서 연 시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산천은 예와 같으나 인물은 간 곳 없구나.’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치안유지법에 걸려 고문을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정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가야 부인의 태도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머슴 수도 줄이고 직접 모나 길쌈을 하기도 한다. 가야 부인은 가정 일에 충실했던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이며, 오히려 이런 강인한 생활상이 그녀를 ‘부권화된 여성’으로 보이게 한다. 그녀의 태도에 더욱 강한 인상은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에서 나타난다. 그녀는 시아버지 오봉 선생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보이는데, 다른 문제와 달리 결코 양보하지 않으며 집을 나가기까지 한다. 시아버지인 오봉 선생도 죽는 순간까지도 유교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오봉 선생은 단순히 위정척사파 선비의 전형을 나타내지만, 가야 부인과 불교는 단순하지 않다. 그녀의 불교에 대한 애착은,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서 공자의 인(仁)이나 석가모니의 자비심은 근본에서 같으며,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도피하는 상황에서도 승병이 고향을 지킨 사실을 들은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그녀가 ‘미륵당’이라는 공간을 만든 것은 집안이 갖은 고난을 당할 때 시어머니가 절에 가서 위안을 찾기를 바란 것도 있고, 괴로운 현실에 부대끼며 사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수라도’는 중편의 분량이면서도 상당히 긴 시간을 배경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있는데, 작품 속에 언급된 사건만 하더라도 한일 합방을 전후로 하여 6.25 전쟁까지 걸쳐 있다. 특히 해방 후까지 일제시대의 흔적이 잔존하고 있으며, 더욱이 분단의 고통까지 겹쳐져 있는 현실은 현대사의 무순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때 징용 당한 대부분의 사람은 귀환하지 못하고 있으며, 돌아온 자는 거지나 병신이 되어 왔고, 정신대에 끌려간 여성들은 한 명도 귀환하지 못했다. 명호 양반 또한 오봉 선생을 닮아 다시 두문불출하여 쳐박혀 있고, 징병을 비해 도망 다니던 막내아들도 결국 반거충이가 되어 돌아다닐 뿐이다. 그에 반해 해방 전 일제의 합방 은사금을 받고도 양반 행세를 하던 이참봉의 아들은 해방 전에 고등계 경부보를 했는데도 해방 직후 잠시 숨어 있다가 다시 경찰 간부가 되고, 몇 해 후엔 작가의 표현대로 “어마어마하게도” 국회의원이 된다. 이에 더해져 멀리서 계속 들려오는 전쟁의 포성은 현실을 더욱 어둡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임종에 다다른 가야부인이 어느덧 시어머니를 닮아가며 천수만 치고 있는 모습은 마지막 전쟁의 ‘포성’과 겹쳐져 약화된 극복 의지와 시대의 비극상을 강하게 부각하고 있다.

 

4. <수라도> 속 노인과 역사성

‘수라도’에서 가야부인을 비롯한 그녀의 시댁 어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수라도’의 중심인물은 가야부인이지만 그녀가 몸담은 시가에는 일제 등살에 못 이겨 간도로 쫓겨나다시피 한 시할아버지와 삼일 만세 때 일제의 총에 죽은 시숙 밀양 양반, 조작된 치안 유지법 사건에 연루되는 시아버지 오봉 선생 등 가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인물들은 한일 합방 이전부터 한국 전쟁의 시기까지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작품의 서두는 가야 부인의 임종 장면으로 열리고, 이때 전쟁의 포성과 가야 부인의 죽음은 종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역사의 비극은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야 부인에서 나타내는 노인은, 지금까지 물려받은 역사의 몫을 실현해온 인간과, 과거의 역사를 토대로 미래를 열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노인을 역사를 체험하고 당대의 모순과 현실을 깨닫고 있는 존재로서 소설에 등장시켜, 당시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래톱 이야기’의 갈밭새 영감, ‘평지’의 허생원, ‘인간단지’의 우중신 노인, ‘과정’의 허교수 등등 전반적인 김정한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김정한의 작품에는 주로 상징성이 강한 공간적 배경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땅’이 그것인데, 구체적인 공간 설정을 통해서 누구라도 한국의 현실을 좀 더 실감나게 집약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토지 문제에 치중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땅’이 지니는 공간성에 주목할 때 비로소 김정한 문학의 진정한 민중성과 현대문학사에 있어서의 가치가 명확해진다. 토지야말로 근대화 과정이 처음 착수되는 영역이자 자본의 야만적인 침탈에 의해 치열한 계급 투쟁이 형성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김정한의 문학이, 자본에 의해 밀려난 변두리 인간의 애환을 독재 정치와 낙후한 경제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의 입장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토지, 땅을 둘러싼 인간들의 투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라도’에서는 ‘땅’을 둘러싸고 생기는 갈등과 투쟁보다는 역사성에 치중하여 당대의 수난과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5. <수라도> 속 ‘미륵당’, 용화사

‘가야 부인’의 종교적 초월은 “미륵당”을 건립하는 것으로 작품 속에서 대변된다. 이 미륵당의 모티브가 된 곳은 경상남도 양산시 오봉산에 있는 용화사로, 1471년(조선 성종 2) 통도사의 승려 성옥(性玉)이 창건하였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990년대에 산신각을 새로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법당과 산신각·요사채 2동이 있으며, 유물로는 보물 제491호로 지정된 용화사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이 석불은 높이 125cm로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을 따른 유물이다. 14세기 무렵 김해의 고암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강에서 건진 뒤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의 옛 절터에 모셔 둔 것을 이 절을 창건한 성옥이 옮겨왔다고 한다. 본래 노천에 있었으나 1947년 법당을 중수하며 법당 안에 모셨다.

용화사와 그 안의 여래좌상의 일화는, 작품 내에서 가야 부인이 강기슭에서 발견한 미륵불상을 모시기 위해 절을, 즉 미륵당을 지은 것으로 각색되어 있다. 이후 미륵당은 숨을 거둔 오봉 선생을 모시는 동시에, 가야 부인의 사위인 박 서방과 옥이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등장한다. 이 미륵당은 전술한 바와 같이 『수라도』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야 부인의 종교적 초월이 실현되는 장소인 동시에, 정신대에 끌려갈 뻔 한 옥이를 박 서방과 혼인시킴으로써 구제하는, 일종의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평생 일제의 부조리에 맞선 오봉 선생이 모셔지는 것 역시 이런 역사의 핍박에 대한 대항일 것이다.

작가는 낙동강의 농민들의 열악한 생활을 폭로한 전작 「모래톱 이야기」 에서도 일제의 지배로 인한 낙동강 사람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한 바 있다. 『수라도』 에서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배의 고통과 부조리, 그리고 이를 버티고 이겨내는 민족의 삶을 형상화했으며, 그 형상화의 중심이 바로 이 “미륵당”, 즉 용화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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