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인물 백이숙제 주나라무왕 주나라문왕 해석
1.백이숙제
중국 주(周)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고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수양산 首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2.무왕
중국의 주(周)를 건국한 왕으로, 기원전 1046년 서쪽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商)을 멸망시키고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성(姓)은 희(姫)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주(周) 문왕(文王) 희창(姫昌)의 둘째아들이므로 중발(仲發)이라고도 한다. 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靑銅器)에서는 ‘무(珷)’라는 글자로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1050년 무렵부터 희창(姫昌)의 뒤를 이어 관중(關中) 평야에 중심지를 둔 주족(周族)을 이끌었으며, 서쪽 제후(諸侯)들을 규합해 상(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였다.
상(商) 말기에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생활했으며,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짓느라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怨聲)도 높아졌다. 무왕(武王)은 상(商)을 정벌하라는 희창(姫昌)의 유지(遺志)에 따라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尚)과 주공(周公) 희단(姫旦), 소공(召公) 희석(姫奭) 등을 중용(重用)하여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1048년 무렵에는 맹진(盟津)에서 800여 제후(諸侯)들의 회맹(會盟)을 이끌며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하였고, 기원전 1046년에는 부패한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촉(蜀), 강(羌), 무로(髳卢), 팽(彭), 복(濮) 등의 부족과 연합하여 상(商)을 공격하였다. 300승(乗)의 전차(戰車)와 45000명 정도의 병사(兵士)를 거느린 주군(周軍)은 허난성[河南省]의 목야(牧野)에서 상(商)의 70만 대군(大軍)과 맞섰는데, 상군(商軍)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던 노예병들의 반란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주왕(紂王)은 녹대(鹿臺)에서 자살하였고, 상(商)은 주(周)에 점령되어 멸망하였다.
무왕(武王)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인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버지인 희창(姫昌)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상(商)의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을 하다 살해된 비간(比干)을 다시 장례 치르고, 유폐(幽閉)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상(商)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부족이나 공신(功臣)들에게 대규모로 분봉(分封)하여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다른 부족들에 분봉하여 신농(神農)의 후인(後人)들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인들은 계(蓟, 지금의 天津 蓟縣)에, 요(堯)의 후인들은 축(祝, 지금의 江蘇 赣榆)에, 순(舜)의 후인들은 진(陳, 지금의 河南 淮陽)에, 우(禹)의 후인들은 기(杞, 지금의 河南 杞縣)의 제후로 각각 봉(封)했다. 또한 상(商)의 유민(遺民)을 통제하기 위해 주왕(纣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商)의 수도였던 은(殷)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주왕(纣王)의 이복형인 미자계(微子啓)에게 상(商)의 제사(祭祀)를 잇도록 하며 송(宋, 지금의 河南 商丘)의 제후로 봉(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 주위에 자신의 3명의 아우들을 분봉(分封)하였다. 관숙(管叔) 희선(姬鲜)을 관(管, 河南 鄭州)에, 채숙(蔡叔) 희도(姬度)를 채(蔡, 지금의 河南 上蔡)에, 곽숙(霍叔) 희처(姬處)를 곽(霍, 山西 霍州)의 제후로 봉했으며, 이를 ‘삼감(三監)‘이라 하였다. 또한 주(周) 건국에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尚)에게 제(齊, 지금의 山東 營丘)를, 주공(周公) 희단(姫旦)에게 노(魯, 지금의 山東 曲阜)를, 소공(召公) 희석(姫奭)에게 연(燕, 지금의 河北)을 각각 분봉(分封)하였다.
하지만 무왕(武王)은 주(周)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성왕(成王)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이 되어(주공이 왕위를 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통치하였다.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함께 요(堯)나 순(舜), 하(夏)의 우(禹), 상(商)의 탕왕(湯王)과 더불어 후대(後代)에 성왕(聖王)으로 숭앙(崇仰)되었다.
3.문왕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 덕치에 힘썼고, 상나라와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제후들의 신뢰를 얻었다. 유가로부터 이상적 군주 칭송 받았다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상(商)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상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민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허강[黃河]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베이[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渡河點)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상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만년에는 위수(渭水)에서 만난 현상(賢相) 여상(呂尙: 태공망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상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상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왕(발 發)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
4.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중국 주(周)나라의 정치가.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해 제도문물을 창시했다. 상족(商族)을 회유하기 위해 아들을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요지에 배치해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해 수비를 공고히 했다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당시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다시 동방을 원정(遠征)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부근 낙읍(洛邑:成周)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중원(中原)의 요지에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5.강태공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본명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望)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6.걸왕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 최후의 왕. 포악하고 사치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에는 그가 "부도덕하고 은(상(商))나라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사. 이름 이계(履癸). 제발(帝發)의 아들로, 상(商) 왕조 최후의 왕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걸주(桀紂)라고도 하며, 흔히 이상적 천자로 추앙받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웅장한 궁전을 건조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워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거기서 남녀 합환의 유흥에 빠졌다고 전한다.
《사기(史記)》에는,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나라(상나라)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그가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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