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작가론은 문학연구

평론하고 깊은 관계가 있다. 작가론을 하려면 평론을 알아야된다.

어떤학자는 문학비평하고 논문하고 깊은 관계가있야한다

 

논문 예) 문법에 맞게 생명

비평 내용보다 표현을 중요시한다.

사실 연구문장하고 평문문장은 정반대이다. 그런데 현대는 같게보는게 많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문학논문이 평론화되는게 추세이다.

-----포인트 :연구한내용은 독특, 내용은 연구내용은 객관적(=문법에 맞도록)

결국 문학연구의 추상화 된다.

 

작가론의 특징

작가의 생애를 다 기술하는게 아니고, 작품을 잘 이해하기위해서 작가의 생애를 안다.

   작가의 정신적 분신이지만 삶과 내용이 일치되는건 아니다. 일치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대일 대응 ㄴㄴ ---전기적오류다. 작가론 = 문학적 전기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분석하는것이다. 예 발자크, 이효석(지극히 보수, 작품 불륜관계를씀)

   삶의 노선과 작품노선이 다르다. /김동리(장사형 인물 많다. 실제 체구 작다. 콤플렉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치되는경우 생택쥐페리

 

작가론 2개

1.동시대작가론

(같은시대 체험을 공유하는 시대, 작가와 만난다. 자룔을 얻을 수 있다.

작가한테 자신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밝혀서는 않다. 왜냐하면 문학가들은 허영이 많다. 그래서 의도가 개입 될 수 있다.

직설적 질문x, 유도적 질문 o 예 장만형작가.

순희라는 인물이 작품에 많다. 실제로는다방여자였다. 산호장 시절을 회상하도록 해서 객관적으로 해서 판단해서.연구자라는 사실을 숨겨야한다.

 

2.후시대작가론

(김만중. 자료에만 의존해서 그 작가의 작품을 살피는것)

 

전기에 빠져가지고 그 성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어야 하는데 소홀히 할 수 있는 폐단이 있다.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찾는 거다.전기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생애를 순차적 기록은 의미가 없다.

특징을 찾아서 작품과 연결 할 수 있어야한다. 전기를 위한 전기가 아니고 작품 해석을 위한 전기가 되어야 한다.

 

작품을 분석할 때 작품과 작품사이에 반복되는 단골 이미지, 단골 화소가 있다.

유사한 이야기, 이미지가 반복된다. 그것을 찾아서 유사성을 찾아 작가의 생애를 찾아관련지어야한다.

예 시인 정지용 독특하게 언어나 이미지를 변형시킨다.

독특하게 자부심이 강하고 평범하지 않고 개성이 강한 시인이다.

생애를 살펴본다. 정지용은 4대독자다.

 

연못지 용용 용꿈을 꾸고태어났다.

넌 용이 된라는 의지를 이름 속에 넣었다. 즉 귀하게 자랐다.

그는 자만심이 강한 개성이 강한 시인으로 성작했다.

 

작가를 나눌 때 특징상

 

지속형인 작가

이기형 소설가 작품주제나 경향이 일관성

정환 소설과 지속적  장만형

         

지속형 작가들 연구방법 : 통시적으로 연구해야한다. 작품의 주제나 경향을 통시대적으로 보고 계열화 시켜서 연구한다.

 

변모형의 작과

변모현 김동리, 시인 김기린 아주 변모형이다.

변모 과정을 연구, 변모의 원인이 생애와 무슨 연과이 있는가가 작가론에서 아주 중요하다.

          서정주, 김춘수, 변모의 기준

          김춘수 자기가 의미를 들어날 때와 숨길때 가 변모의기준

          서정주 주제의 기준으로 보면 변모의 기준이 있다

          김기림  소재를 중심으로 변모의 기준

          박목월  자연을 소재로 도시 생활 삶으로 기준으로 변모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변모가 중용 / 변모가 작가 더 많다.

변모론 적은 연구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기계론 적으로 이렇다라고 말하면 라고 말하면 안되다.

 

 

춘원의 호에대한 설명 

춘원의 호 외배 고주 보경 경서학인 장백산인 향산광망 산광명 창씨개명한 이름

호 많다 = 활동을 많이 했다.

폭넓은 활동으로 인해 호가 많다. 호가 많다. = 작품이 많다. 다산 정약용

 

현대 춘원 욕당 요한 호가 많으니, 작품이 많으니 평가도 복잡하다.

왜그렇게 찬반이 엇갈리는가

 

춘원은 한국근대소설의 개척자다. 천태산인 한국최초의 현대소설의 개척자다

 

부정적인 평가 친일 행위를 함,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결핍된 사람이다.

부정적인 평가 정리되어있다.

 

철학이 없는 계몽주의자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주의자 / 한국의 실학 사상에 대한 무지

 

 소설기법상 결점( 영미에 반해서)

과잉노출, 논설적, 우연성(흥미위주다.)-필연성이 없다.

 

무정을 살펴보자.

무정이 현대소설으로서 무게를 가진 작품인가?(최초래이게 최초 현대소설이래)

남녀 애정관한 내용 삼각관걔의 애정소설

춘원은 낭만주의자 그 당시 학생들의 꿈을 담은 인물이 이형식

당시 젊은이들의 꿈 일본유학을 가서 성공해서 돌아오는 것

 

이형식(영어교사) 박영채(기생) 김선형(부잣집딸,신여성)

박진사(헌신적교육자) 김장로(평야감사 아들 전직 외교관)

 

이형식은 박진사의 딸, 김선형을 택함

 

신우선(형식의 친구, 적극적 진취 이형식과 반대 이형신 소극)

김병옥(신여성 독신주의자)

 

무정의 시간적구성 (총126회 신문에 연재된 장편 소설)

오른쪽 숫자는 횟수를 말함

이 소설은 전대 소설을 비해서 뚜렷한 시간구성으로 이루어짐

예 1. 17 첫날은 17회에 거쳐 나옴

 

1. 첫날 오전과 오후로 전개 됨. 아주 기분이 좋음. 

    첫날은 대개 영채의 회고담으로 구성됨

    영채 교육사업하다 살인사건에 연루 되어 감옥 갇힘

    영채는 몸을 팔아 아버지를 구하려 하지만 아버지는 자결함

 

2. 학생들이 strike를 이르킴. 사실 선형이는 학생들의 파업에는

관심이 없고, 어제밤에 영채를 생각함. 그리고나서 영채를 만나려

간다. 영채가 평양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평양에 감. 평양가서

(자신의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함)

 ->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김을 소설로 표현했다는 평론가도 있음

 

영채가 유서를 씀. 정절을 지키려했으나 겁탈을 당함으로 살가치가 없다고

자결을 결심하고 평양(아버지 무덤)으로 떠남.

신우선은 영채를 찾가 간다. 유서만 발견

유선은 평양으로감 박진사의 묘소를 찾아간다.

 

다음날 돌아감 학교로 돌아감. 많은 일이 벌어짐.

학교에 기생을 찾아 떠남을 알고 풍문이 떠돔.

그일로 학교를 사퇴하게됨. buy은 선형과 약혹을 하게됨

 

복합적인 문제로 혼란을 격음

 

독자들이 궁금해함. 영채가 죽었나 살았나.?

작가는 영채에 대한 얘기는 없고 다른 얘기만 한다.

평론가 : 김동인이 공격한다. 다뽀로다. 다뽀로 : 중요한것을 나두고

딴소리한다. )

 

이 소설은 1,2,3,4,5째날. 뚜렷한 시간구성이 명확이 드러나고, 전개되고

그후 10개월간 내용이 나옴

거기서 병옥이라는 신여성을 만나고 영채는 생각을 바꾼다.

영채 봉건적인 여성. 신여성 병옥을 만나고 신사상을 받아드리게 된다.

병옥이를 따라가서 같이 생활한다.

병옥이는 독신주의자이고 신여성이다.

한달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이형식과 선형과 약혹하고 일본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데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흥미위주가 아니냐. 결점지적

 

기차가는 중에 홍수가 남. 거기서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서

상화엥서 이형식이 연설을 하고 계몽주의적 사상 피력.

 

말미에서 4사람다 성공해서 돌아온다고 한다.

 

한달동안 집필함.

 

무정은 두가지 요소로 결합되어있다.

영채에 관한 부분 회고담. - 신소설적인 부분

춘원 자신의 자소전적 느낌

 

자가 춘원과 이형식과 유사점이 상당이 많다.

작가,주인공 누이가 있고 어린시절에 부모를 여임

신분도 유사 일본유학 유학생 연형도 같고, 소설에 나오는

박진사라는 인사와 박찬명 대령집에서 비서노릇을함

박진사와 이형식, 박찬명과 춘원.의 관꼐가 비슷한다.

딸들의 유사점. 그러므로 자서전적 요소가 많다.

 

소설사적으로 어떤 영햐잉 있는가

문장 호흡이 길고, 이걸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잘 했다.

문장상의 장점

주제상에서 당시의 시대정신과 사회의식을 잘 반영햇따.

자유연애, 사회상. 실리를 택한 이형직

 

문체상에서 일상어 문체 확립함. 시제의 분화 하도다. 하는다.

과거 현재가 불명확한 문체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구별가능한 구어체를 사용.

대명사를 씀. 대명사 사용은 문제가 되는데 여자와 복수 구분없이

그를 썼다. 춘원은 그냥 단수,복수,남,녀 구분 x

시간 구성

독특한점 보조 인물의 배치로 인물을 입체화 시킴

이형직 우유부단 소극적인데

신우선이라는 적극적인 인물을 배치함으로서

영채라는 인물 유교적 질서에 사고방식 구시대적 사고방식

병옥이란느 인물 배치 신사사을 받아들이게 하고

인물을 입체화 시키기위해서 입체화 시켰다는점

 

심리묘사가 두드러졌다.

사건의 스케일이 커졌다.

 

장편소설로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단점설명

주인공의 성격 창조와 주인공의 실패

예 이형식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 기생을 찾아다님.

교사들사이에 호모섹서로 소문 이윤배반적이라는 인물 설정

교사면 공직성. 인물모순 실리추구

영채 기생으로서 정조관념을 추구했다는점

이런건 모순적 인물을 창조햇다는점에서 주인공의 성격 창조를

실패했다.

 

필연성이 결여된 통속적인 사건이 있다.

예 개의 비현실적 출연.

영채가 남의 집살이를 한다. 집주인, 괴한을 만남.

괴한을 개가 물리친다. 겁탈당할 직전에 개가 물리침

두가지점

신문소설 애로틱함 겁탈당할뻔 신문소설이 요구하는 특징

            + 개가 등장함 비현실적인 개의 출현

필연성이 결여된 통속적인 사건으로 봄

 

박진사가 제자의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가서 자결한점

죽을 이유가 없다.

 

이형식이 변덕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기생을 쫓아 다니고

홈어로 소문나 있고 이것은 배반적인 인물로 보인다.

 

영채가 평양사에서 겁탈당하는 장면을 목격한것

신문 연재소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신문소설 상당히 애로틱한것을 요구

 

거의다 신문 소설이다. 순수소설이 아니다.

여건이 없다.

 

무정만이 아니라 무영탑, 등등... 많은요소들이 이같은 요소가 있다.

 

통속적이것 기차 속에서 만나는 것

->흥미위주다. 필연성이 결여된다.

 

그러나 현대소설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작가의 전기적인 특징이 작품에 드러나있는거 를 밝히는게 중요

 

고아라는것 10살때 부모를 다잃음 외배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와 같다.

호 에도 반영했다. 유교사상 부정 반유교적 입장에서 문학활동을 했다.

자녀 교육론이나 논설에 보면 효도사상 보다는 자녀를 더 소중히 해야한다.

정조개념에 대한 부정

 

재주있어서 엘리적 의식이 강했다. 나르시즘에 빠져서 자신의 행위를 미화시켰다.

친일 행위도 미화함

 

약소민족체험: 동학에 가담해서 비서노릇을함. 망국의 서로움을 시에 많이 반영시킴

자주독립을 각성하는 글을 많이 씀 젊었을때. 약소믽고체험을 젋었을때 자주의식강화라는 것으로 글을 씀

 

작가체험 :고대소설을 많이 읽었고, 한시문에 밝음, 일본어를 통해 톨스토이를 경도함. 좋아함.

 

4개 / 그런요소들이 작품에 잘 반영되어있다.

 

왜 춘원을 현대 소설의 개척자라고 하나. 무정부터 현대소설의 출발으로 보는 이유

김태준의 소설사에서도 현대소설의 첫작품을 무정을

백철이 쓴 국문학전사에서도 무정

조향연 현대소설사 무정을

현대소설으로 뽑는다.

 

많은 비평가 평론가가 무정으로 뽑는다.

현대소설의 출발의 기점으로 잡는다.

 

많은 결점이 있었다. 주인공 성격이 이율배반적이다. 성격창조실패

작가의식 과잉 노출 우연성, 통속성 많다.

 

무정 작품톤이 안 맞는다. 박영채 이형식이다. 중요인물은.

박영채의 회고담이 길다. 이는 신소설적 요소다.

후반부는 춘원의 자소전적 요소다.

소설적 결함이다.

 

그것은 작품내적의 필연성이라기 보다는 상황성이다.

무정은 문화적 사건이다. 신문에 소설이 연재되는 것은.

무정에대한 독자들의 인기가 선풍적이였다.

 

신문연재소설상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압도적인 영향.

문화적인 사건이 소설적 영향이 문학사적인 평가로 이월되는 현상이 나타남.

결국 중요시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황에 의해서

이소설이 문화적 상황에서 중요한 작품이되었다.

 

작품내적 보다 작품외적인 사건에 의해서 높이 평가 받았다.

신문사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결점이 많이 보임

외국 문학연구자들에 의해 비판을 많이 받았다.

외국 문학의 수준과 무정의 수준을 비교하면 부족한부분이 많다.

신소설에 비하면 많은 장점있다.

심리묘사 유연한 문장을 통한 작가의 내적 세계를 언어로 표출해가지고 신소설과는

다른 면모의 소설을 보여졌다.

 

통속성이라든지 극복한 작품은 무명

무명은 리얼리틱함. 시의 시대 정신을 작품에 반영함.

유정이라는 작품.

유정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영화도 3번이나 찍음

유정은 무정에 비해서 훨씬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 체험적인 요소가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728x90
728x90

한문학사 한시해석2 과제

登潤州慈和寺上房(등윤주자화사상방)-崔致遠(최치원)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崔致遠(최치원)

登臨暫隔路岐塵(등임잠격노기진) : 절에 올라보니, 잠시 속세 티끌 벗어났다

吟想興亡恨益新(음상흥망한익신) : 흥망을 읊어 생각하니 한이 더욱 새로워라

畫角聲中朝暮浪(화각성중조모랑) : 피리소리에 아침저녁 물결 일고

古山影裏古今人(고산영이고금인) : 오래된 산 그림자 속엔 고금의 많은 사람

霜摧玉樹花無主(상최옥수화무주) : 서리 내린 나무에 임자 없는 꽃이라

風暖金陵草自春(풍난금릉초자춘) : 바람 따뜻한 금릉 지방 풀은 절로 봄이다

賴有謝家餘境在(뇌유사가여경재) : 마침 거부 사씨 집안 땅이 남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장교시객상정신) : 길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을 맑게 하는구나

인간세상을 뛰어넘는 시인의 초연한 세계를 회고적으로 노래하여 문장가로서의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다. 최치원은 입당등제(入唐登第)하여 그곳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거니와, 특히 이 작품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가 중국에 알려진 초기의 것으로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장사꾼들 가운데에서 시를 구득(購得)하려는 자는 모두 이 시를 써서 보일 정도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렀네.

장마비 그쳐 향기 날리고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통일 신라 말, 대문인(大文人) 최치원의 오언 율시(五言律詩), '촉규화(접시꽃)' 라고 하오.

 

당나라 유학 시절,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형상화 하고 있소.

당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거친 밭(신라)'에서 태어났지만 그 어느 당나라인보다 학문적 지식이 뛰어난

'탐스런 꽃송이'인 자신을 '수레와 말 탄 사람(고위 계층)'이 알아주지 않고 정작

'벌과 나비(자신보다 못한 범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애석하고 한스럽다는 의미라 하오

큰 포부를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건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길거리의 흔하디 흔한 접시꽃(촉규화)로 비유한 최치원의 체념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오.

그러나 참고 견딘다는 그 말과 같이, 마침내 학자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니, 이 글을 읽는 무림동도께서도

부디 지금 '나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 하여 포기하지 말고 자기자신을 믿으며 굳건히 버텨야만 하오.

절대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겠지..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으리?

그 어떤 압력과 고통에도 견딜 수 있도록, 무림비급 <금강불괴>를 강력하게 권하는 바,

지금 무림비급의 이름아래, 당신의 혼을 더하시오!

이 시는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접시꽃 촉규화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노래한 오언 율시의 한시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개간하려고 않는 척박한 곳에 쓸쓸히 피어 있어 아무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는 흔한 접시꽃을 통해 당대 신라의 척박한 풍토를 풍자하고 있다.

---------------------------------------------

 

 

<제가야산>은 자연의 물소리에 의탁하여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를 멀리하고자 하는 은둔의 결의를 노래한 작품이다. 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여러 바위들을 바쁘게 달려 이산저산에서 아우성치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을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시비가 귀에 들릴까 늘 걱정되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감싸게 한 것이라네.

----------------------------------------------------

 

 

신라오기(新羅五伎)의 하나.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에서 월전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깬 솟고 목은 움칠 꼭다린 오뚝,(肩高項縮髮崔嵬)

여러 한량 팔 비비며 술잔 다툰다.(壤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 듣고 나서 웃어젖히며,(聽得歌聲人盡笑)

초저녁이 지새도록 깃발 붐빈다(夜頭旗幟曉頭催

----------------------------------------------------

 

 

4.최행귀(崔行歸)의 예경제불송(禮敬諸佛頌)

以心爲筆畵空王(이심위필화공왕) 마음으로 붓을 삼아 그린 부처께

瞻拜唯應遍十方(첨배유응변시방) 우러러 절하나니 시방 두루 하오시라

一一塵塵諸佛國(일일진진제불국) 하나 하나의 티끌마다 부처 나라요

重重刹刹衆尊堂(중중찰찰중존당) 곳곳의 절마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법당이어라

見聞自覺多生遠(견문자각다생원) 보고 듣고 먼 여러 생을 스스로 깨우치니

禮敬寧辭浩劫長(예경영사호겁장) 예배와 공경에 어찌 겁을 마다하리까

身體語言兼意業(신체어언겸의업) 몸과 말과 더불어 생각으로 이루니

總無疲厭此爲常(총무피염차위상) 전혀 피곤과 싫증이 없이 이를 한결같이 행하오리다

----------------------------------------------------

<대인기서, 동문선 권 19>

 

一別征車隔歲來 전장으로 가는 수레 한번 이별하고 해가 바뀌어 오네

幾勞等覩倚樓臺 누대에 기대어 기다리고 바라기를 얼만 애썼던가.

雖然有此相思苦 비록 이토록 서로 그리는 괴로움 있다 하여도

不願無功便早廻 공을 못 이루고 일찍 돌아오길 원하진 않는다오.

 

----------------------------------------------------

 

구제학당 최충

滿庭月色無煙燭 뜰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이요

入座山光不速賓 방안에 든 산 그림자는 서두르지 않는 손님일세.

更有松絃彈譜外 솔바람 소리는 악보에도 없는 음악을 들려주니

只堪珍重未傳人 다만 보배롭게 여길 뿐 남에게 전해주진 못하네.

龍騰虎距列穹豊 용이 나는 듯 호랑이가 버틴 듯 큼지막히 늘어서

壯氣能銷鳳炭紅 씩씩한 기운은 봉황이라도 붉게 구워낼 듯하네.

莫向晨昏爭燕蝠 제비와 박쥐에게 새벽이니 저녁이니 다투지 말고

好將行止付天公 나아가고 물러나길 하늘의 뜻에 맡김이 좋다네.

 

----------------------------------------------------

 

 

掛眼東門憤未消 눈알을 빼어 동문에 걸어 두어도 분노가 덜 삭아

碧江千古起波濤 푸른 강물이 천년 세월에 파도를 일으키네.

今人不識前賢志 오늘날 사람들 옛 현자의 뜻은 알지도 못하고

但問潮頭幾尺高 다만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묻고만 있네.

----------------------------------------------------

 

 

長城一面溶溶水 긴 성 한쪽은 콸콸 넘치는 물이요

大野東頭點點山 큰 들 동쪽 머리는 점점이 산이로다.

==============================================

 

 

김부식(金富軾, 1075~1151)

045 감로사 <감로사차혜원운

俗客不到處 속세 나그네 이르지 않는 곳

登臨意思淸 올라 보니 마음이 맑아지네.

山形秋更好 산 모양은 가을에 더욱 좋고

江色夜猶明 강 빛은 밤에 오히려 밝구나.

白鳥高飛盡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孤帆獨去輕 배는 외로이 혼자 떠가네.

自慚蝸角上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半世覓功名 반평생 헛이름만 찾았구나.

----------------------------------------------------

 

 

鄭知常詩 정지상 서도

紫陌春風細雨過 번화한 거리 봄바람에 가는 비 내려

輕塵不動柳絲斜 가벼운 먼지 일지 않고 실버들만 늘어졌네.

綠窓朱戶笙歌咽 푸른 창과 붉은 문에선 목 메인 노래 가락

盡是梨園弟子家 바로 그 모두가 이원의 제자 집들이라네.

----------------------------------------------------

 

 

홍랑

패강루강제영(浿江樓舡題詠) 대동강 놀이베에서 읊음

수안유유양류다(水岸悠悠楊柳多) 물가 언덕 한가롭게 버들숲들 참 많은데

소강요창채련가(小舡遙唱采蓮歌) 저 멀리 작은 배선 연밥 다는 노래 소리

홍의락진추풍기(紅衣落盡秋風起) 붉은 꽃잎 다 떨어져 가을 바람 불어오니

일모방주생백파(日暮芳洲生白波) 해진 무렵 물가에선 하양 물결 일어나네

----------------------------------------------------

---------------------------------------------------

 

728x90
728x90

주나라 인물 백이숙제 주나라무왕 주나라문왕 해석

 

1.백이숙제

중국 주(周)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고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그 무렵 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왕(紂王)을 토멸하여 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수양산 首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2.무왕

중국의 주(周)를 건국한 왕으로, 기원전 1046년 서쪽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商)을 멸망시키고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성(姓)은 희(姫)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주(周) 문왕(文王) 희창(姫昌)의 둘째아들이므로 중발(仲發)이라고도 한다. 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靑銅器)에서는 ‘무(珷)’라는 글자로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1050년 무렵부터 희창(姫昌)의 뒤를 이어 관중(關中) 평야에 중심지를 둔 주족(周族)을 이끌었으며, 서쪽 제후(諸侯)들을 규합해 (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였다.

 

(商) 말기에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생활했으며,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짓느라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怨聲)도 높아졌다. 무왕(武王)은 (商)을 정벌하라는 희창(姫昌)의 유지(遺志)에 따라 태공망(太公望) 강(姜尚)과 주공(周公) 희단(姫旦), 소공(召公) 희석(姫奭) 등을 중용(重用)하여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1048년 무렵에는 맹진(盟津)에서 800여 제후(諸侯)들의 회맹(會盟)을 이끌며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하였고, 기원전 1046년에는 부패한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촉(蜀), 강(羌), 무로(髳卢), 팽(彭), 복(濮) 등의 부족과 연합하여 (商)을 공격하였다. 300승(乗)의 전차(戰車)와 45000명 정도의 병사(兵士)를 거느린 주군(周軍)은 허난성[河南省]의 목야(牧野)에서 (商)의 70만 대군(大軍)과 맞섰는데, 군(商軍)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던 노예병들의 반란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주왕(紂王)은 녹대(鹿臺)에서 자살하였고, (商)은 주(周)에 점령되어 멸망하였다.

 

무왕(武王)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인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버지인 희창(姫昌)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商)의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을 하다 살해된 비간(比干)을 다시 장례 치르고, 유폐(幽閉)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商)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부족이나 공신(功臣)들에게 대규모로 분봉(分封)하여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다른 부족들에 분봉하여 신농(神農)의 후인(後人)들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인들은 계(蓟, 지금의 天津 蓟縣)에, 요(堯)의 후인들은 축(祝, 지금의 江蘇 赣榆)에, 순(舜)의 후인들은 진(陳, 지금의 河南 淮陽)에, 우(禹)의 후인들은 기(杞, 지금의 河南 杞縣)의 제후로 각각 봉(封)했다. 또한 (商)의 유민(遺民)을 통제하기 위해 주왕(纣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商)의 수도였던 은(殷)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주왕(纣王)의 이복형인 미자계(微子啓)에게 (商)의 제사(祭祀)를 잇도록 하며 송(宋, 지금의 河南 商丘)의 제후로 봉(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 주위에 자신의 3명의 아우들을 분봉(分封)하였다. 관숙(管叔) 희선(姬鲜)을 관(管, 河南 鄭州)에, 채숙(蔡叔) 희도(姬度)를 채(蔡, 지금의 河南 上蔡)에, 곽숙(霍叔) 희처(姬處)를 곽(霍, 山西 霍州)의 제후로 봉했으며, 이를 ‘삼감(三監)‘이라 하였다. 또한 주(周) 건국에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강(姜尚)에게 제(齊, 지금의 山東 營丘)를, 주공(周公) 희단(姫旦)에게 노(魯, 지금의 山東 曲阜)를, 소공(召公) 희석(姫奭)에게 연(燕, 지금의 河北)을 각각 분봉(分封)하였다.

하지만 무왕(武王)은 주(周)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성왕(成王)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이 되어(주공이 왕위를 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통치하였다.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함께 요(堯)나 순(舜), 하(夏)의 우(禹), (商)의 탕왕(湯王)과 더불어 후대(後代)에 성왕(聖王)으로 숭앙(崇仰)되었다.

 

 

3.문왕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 덕치에 힘썼고, 상나라와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제후들의 신뢰를 얻었다. 유가로부터 이상적 군주 칭송 받았다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상(商)나라에서 온 태임(太任).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상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웨이수이강[渭水]을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시안[西安] 남서부 펑이[豊邑], 즉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동이(東夷)민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허강[黃河]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베이[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渡河點)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상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만년에는 위수(渭水)에서 만난 현상(賢相) 여상(呂尙: 태공망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상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상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왕(발 發)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뒤에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으며, 문왕과 무왕의 덕을 기리는 다수의 시가 《시경(詩經)》에 수록되어 있다.

 

 

4.주공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중국 주(周)나라의 정치가.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해 제도문물을 창시했다. 상족(商族)을 회유하기 위해 아들을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요지에 배치해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해 수비를 공고히 했다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당시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다시 동방을 원정(遠征)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부근 낙읍(洛邑:成周)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중원(中原)의 요지에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5.강태공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본명 강(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望)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6.걸왕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 최후의 왕. 포악하고 사치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에는 그가 "부도덕하고 은(상(商))나라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사. 이름 이계(履癸). 제발(帝發)의 아들로, 상(商) 왕조 최후의 왕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걸주(桀紂)라고도 하며, 흔히 이상적 천자로 추앙받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웅장한 궁전을 건조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워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거기서 남녀 합환의 유흥에 빠졌다고 전한다.

 

사기(史記)》에는,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나라(상나라)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그가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728x90

'대학생과제 > 전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론 정리1  (0) 2020.01.15
한문학사 한시해석2 과제  (0) 2020.01.14
한문학사 한시 해석  (0) 2020.01.12
구비문학의 변천으로 보는 장자못 전설  (0) 2020.01.07
오장환작가의 생애와 시세계  (0) 2020.01.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