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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문학사 작가 1~77>

 

 

 

1. 최남선(崔南善1890~1957): 호는 육당(六堂), 대몽최(大夢崔), 한샘. 서울 중인(中人) 출신으로 13세에 논설을 발표할 만

큼 조숙했다. 그는 2차에 걸쳐 도일(渡日), 와세다대(早稻田大)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 귀국하여 신문관(新文舘)을 발족, 종합지인 《소년(少年)》에서 《청춘(靑春)》에 이르기까지 여러 잡지를 속간하는 한편, 《춘향전(春香傳)》,《열하일기(熱河日記)》 등 많은 고전(古典)을 간행했다. 또 「동명사(東明社)」를 발족시켰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발간했다. 이러한 출판․언론활동과 함께 그는 폭넓은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를 통하여 자주독립과 신교육사상을 계몽했다. 따라서 그는 신문화 계몽운동의 선구자로, 또 개화기의 대표적 문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문학적 공적은 시조․시인으로서의 업적이 돋보인다. 신체시(新體詩)라는 새로운 시형(詩型)을 시도했으며,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등의 많은 창가(唱歌)를 발표했고, 또 시조 중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수필가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언문일체(言文一體)의 신문장운동(新文章運動)에 앞장섰다. 후기에 사학자(史學者)로 크게 활동했으니, 평이한 역사서를 써서 국사의 대중화를 꾀했고, 이를 통하여 조선주의(朝鮮主義)를 주창했다.

저서에 <백팔번뇌(百八煩惱)>(26), <시조유취(時調類聚)>(28), <심춘순례(尋春巡禮)>,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조선역사(朝鮮歷史)>, <고사통(故事通)>, <역사일감(歷史日鑑)>, <조선유람가(朝鮮遊覽歌)>, <아시조선(兒時朝鮮)>, <단군론(檀君論)>,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국난극복사(國難克服史)> 등이 있다.

 

2. 이광수(李光洙, 1892~?): 호는 춘원(春園), 고주(孤舟), 외배, 보경(寶境), 경서학인(京西學人), 장백산인(長白山人), 香山光郞. 평북 정주 출신. 일찍 양친을 잃고 고아로 성장, 도일(度日)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을 졸업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철학과에 재학 중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연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한국현대소설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또 유교적 사회논리를 비판하고 서구사상적 논설을 발표했다. 소설을 비롯 시․평론․수필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그는, 육당(六堂)과 함께 신문학운동의 핵심 문인이었다. 초기 신체시인으로서, 또 최초의 현대소설가로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장을 확립한 사람으로서, 그는 한국 현대문학의 기초를 확고히 했다. 그의 문학적 특성은 대중본위(大衆本位)로 작품을 쓴 점이다. 민중을 교화시키고 그들에게 이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작품을 썼기에, 지나친 계몽성이 예술의 본령을 이탈한 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특히 그의 계몽적 민족주의는 친일행위로 그 빛을 잃고 있다. 그의 공적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으나, 최초의 현대소설가로서 신문학(新文學)에 끼친 공은 부정할 수 없다.

저서에 <무정(無情)>(17), <개척자(開拓者)>(18), <재생(再生)>(25), <마의태자(麻衣太子)>(29), <단종애사(端宗哀史)>(29), <이순신(李舜臣)>(31), <흙>(32), <그 여자의 일생>(33), <유정(有情)>(35), <사랑>(39), <꿈>(48), <원효대사(元曉大師)>(48), 단편으로 <무정>(10), <소년의 비애>(17), <방황(彷徨)>(17), <무명(無明)>(39) 외 <3인 시가집> 등이 있다.

 

3. 김억(金億, 1893~?): 호는 안서(岸曙). 평북 정주 출신. 게이오의숙(慶應義熟) 중퇴, 일본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징파의 작품을 중심으로 해외시를 번역 소개하는 한편, 창작시를 발표, 신시운동(新詩運動)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폐허(廢墟)》동인(同人)으로 활약 보들레르를 찬양하는 등 퇴폐적 분위기를 조장했다. 이러한 그의 서구시(西歐詩) 수용은 당시 문단에 큰 자극을 주어, 감상적 경향이 한때 시단(詩壇)에 풍미하게 되었다. 그는 또 타고르의 <기탄자리>, <원정(園丁)>, <신월(新月)>과 A.시몬즈의 시집 《잃어버린 진주》를 번역했다. 그 후 한시(漢詩)에 경도(傾倒)되어 동양의 한시를 번역했다. 그의 시세계는 서구시의 수용에 몰두했던 전기와 한시에 심취했던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 시는 애상적 경향을 띠었고, 후기시는 동양정신이 바탕을 둔 민요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Esperanto語 보급에도 큰 공을 남겼다.

창작 시집으로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 23), 《금모래》(조선문단사 25), 《봄의 노래》(매문사 25), 《안서시집(岸曙詩集)》(한성도서 29), 《안서시초(岸曙詩抄)》(박문서관 41), 《먼동이 틀 제》(백민문화사 47), 《민요시집(民謠詩集)》(한성도서 48), 번역시집으로 《오뇌(懊惱)의 무도(舞蹈)》(광익서관 21), 《신월(新月)》(24),《기탄자리》(23), 《잃어버린 진주》(24), 《원정(園丁)》(24), 《망우초(忘憂草)》(34), 《동심초(同心草)》(43), 《꽃다발》(44), 《지나명시선(支那名詩選)》(44), 《야광주(夜光珠)》(44), 《금잔디》(47), 《옥잠화》 등이 있다.

 

4. 황석우(黃錫禹, 1895~1959): 호는 상아탑(象牙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정경과(政經科) 졸업.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시전문지(詩專門誌)《장미촌(薔薇村)》과 《조선문단(朝鮮文壇)》을 주재(主宰)했다. 그는 스스로 상징주의(象徵主義)를 표방 온유(溫柔)와 상징(象徵)을 잘 구사하여 당시 난해한 시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경향을 실제로 실험한 현대시 초기의 상징적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 <벽모(碧毛)의 묘(猫)>, <하늘 가운데의 섬>, <광선(光線)의 부채>, <달과 태양의 교차(交叉)> 등과 시집으로 《자연송(自然頌)》이 있다.

 

5. 김동인(金東仁, 1900~51): 호는 금동(琴童), 금춘사(春士). 평양(平壤) 명문가(名文家) 출신으로 초년은 호화로웠으나 말년은 비참하게 보냈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자비(自費)로 동인지 《창조(創造)》를 창간하여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1919)을 발표했다. 이어 《영대(靈臺)》를 발간, 초창기 한국문단 형성에 크게 기여하며, 순수문예활동(純粹文藝活動)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즉, 춘원의 계몽주의문학에 반발하여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보였고, 카프의 전성기에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는 순수문학활동의 선두주자(先頭走者)였다. 그의 업적은 한국 단편소설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즉, 간결(簡潔), 직핍(直逼)한 서술, 단일(單一)한 구성, 입체적(立體的) 성격창조, 문장의 혁신 등을 보여, 본격적인 단편소설을 쓴 최초의 현대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소설은 평자(評者)들에 따라 자연주의(自然主義), 사실주의(寫實主義), 탐미주의(耽美主義) 등으로 계보화(系譜化)되리만큼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평론으로도 일가견(一家見)이 있어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유명하다. 단편 <배따라기>, <목숨>, <태형(笞刑)>, <감자>, <정희>, <무명(無明)>, <광염 소나타>, <광화사(狂畵師)>, <배회(徘徊)>,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과 장편 <젊은 그들>, <대수양(大首陽)>, <아기네>, <운현궁의 봄>, <해지는 지평선> 등이 있다.

 

6. 염상섭(廉想涉, 1897~1963): 호는 횡보(橫步), 서울 출신. 일본 게이오대학 문과 중퇴. 1920년 《폐허》동인으로 문단생활 시작. 식민지(植民地) 지식인의 정신적 고뇌와 어두운 사회현실을 그린 <표본실(標本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어 <만세전(萬歲前)>, <제야(除夜)>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삼대(三代)>는 봉건지주(封建地主)인 조부(祖父)와 개화교육파(開化敎育派)인 부친과 신세대의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 나를 대비시킨 작품이다. 그는 언론활동도 했고 평론가로 프로문학과 대립적 입장을 취했다. 장편으로 <사랑의 죄(罪)>(27), <이심(二心)>(28), <광분(狂奔)>(29), <취우(驟雨)>(52)와 단편으로 <해방(解放)의 아들>, <재회(再會)>, <임종(臨終)>, <일대(一代)의 유업(遺業)>, <두 파산(破産)>등이 있다.

 

7. 박종화(朴鍾和, 1901~81): 호는 월탄(月灘). 휘문의숙(徽文義塾) 졸업. 《장미촌(薔薇村)》, 《백조(白潮)》 동인으로 낭만적 시를 쓰는 한편, 평필(評筆)도 들어 <대전이후(大戰以後) 조선(朝鮮)의 문예활동(文藝活動)> 같은 논문(論文)을 발표했다. 그 후 역사소설(歷史小說)로 전환하여 많은 장편을 발표했다. 해방 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우익진영(右翼陣營)의 대표자로 문단의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했다. 시집으로 《흑방비곡(黑房秘曲)》, 《청자부(靑磁賦)》가 있고, 역사소설로 <금삼(錦衫)의 피>, <대춘부(待春賦)>, <다정불심(多情佛心)>, <임진왜란(壬辰倭亂)>, <여인천하(女人天下)>, <자고가는 저 구름아>, <세종대왕(世宗大王)> 등이 있다.

 

8. 현진건(玄鎭健, 1900~43): 호는 빙허(憑虛), 대구 출생. 일본 동경 성성중학(成城中學)을 거쳐 상해 호강대학(滬江大學) 독일어과 중퇴, 1920년 《개벽(開闢)》 <희생화(犧牲花)>를 발표하여 등단, 이듬해 <빈처(貧妻)>, <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문명(文名)을 얻었다. 《백조(白潮)》 동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적 사회의식(民族的 社會意識)이 강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경향이 짙어 한국의 사실주의적 소설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피아노>(22), <할머니의 죽음>(23), <운수 좋은 날>(24), <불>, <B사감과 러브레터>(25) 등의 단편과 장편 <무영탑(無影塔)>(38)과 <적도(赤道)>가 있다.

 

9. 나빈(羅彬, 1902~27): 호는 도향(稻香), 경성의전(京城醫專) 중퇴, 《백조》 동인으로 참가, 1921년 <젊은이의 시절>,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등 소년적인 감상(感傷)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幻戱)>를 연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23년 <17원 50전>, <행랑자식>, <여이발사(女理髮師)> 등의 단편을 계기로 감상주의를 청산하고, <전차차장(電車車掌)의 일기>,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지형근(池亨根)> 등의 작품에서 냉정한 작가적 안목으로 어두운 현실을 묘사, 건강한 리얼리즘의 세계에 도달했다.

 

10. 전영택(田塋澤, 1894~1967): 호는 늘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신학부 졸업. 《창조(創造)》 동인으로 <惠善의 죽음>, <천치(天痴)냐 천재(天才)냐>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어서 <생명(生命)의 봄>, <운명>, <독약을 마시는 여인>, <사진>, <화수분>, <흰 닭> 등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기독교와 관계하면서 <소>,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 <새 봄의 노래>, <강아지>, <금붕어> 등의 단편을 발표했다.

 

11. 주요섭(朱耀燮, 1902~72): 호는 여심(餘心), 호강대학(滬江大學) 교육과 졸업, 스탠포드(Stanford)대학에 유학. 1921년 《개벽》에 <추운 밤>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 그는 <인력거(人力車)꾼>, <살인(殺人)>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층 계급(下層 階級)의 생활과 반항의식(反抗意識)을 다루고 있어 신경향파(新傾向派)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단편으로 <사랑손님과 어머니>, <추물(醜物)>, <아네모네의 마담>, <개밥>, <눈은 눈으로>, <세 죽음> 등과 장편으로 <구름을 잡으려고>, <길>, <망국노군상(亡國奴群像)> 등이 있다.

 

12. 계용묵(桂鎔黙, 1904~61): 평북 선천 출생, 1922년 단편 <상환(相換)>이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최서방(崔書房)>, <인두주지(人頭蛛蜘) 등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10년여 침묵을 지킨 다음, 1935년 <백치(白痴) 아다다>로 재기(再起)하여, <마부(馬夫)>, <병풍에 그린 닭이>, <청춘도(靑春圖)>, <부부(夫婦)> 등의 단편을 발표, 서민들의 애환(哀歡)을 순수묘사, 압축된 정교미(精巧美)를 보였다. 단편으로 <금단(禁斷)>, <별을 헨다>, <바람은 그냥 불고>, <물매미>, <수업료> 등과 수필집 《상아탑(象牙塔)》이 있다.

 

13. 주요한(朱耀翰, 1900~79): 호는 송아(頌兒), 동경 제 1 고보 및 호강대학(滬江大學) 졸업, 그는 《창조》에 <불놀이>를 발표,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는 1924년에 창작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발간했다. 총 66편이 실린 이 시집은 고운 가락에 아름다운 서정을 담고 있어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신간회(新幹會) 등 사상운동에 관여했고, 종래 정계(政界)에 투신했다. 대표작으로 <빗소리>, <봄달잡이> 등의 시가 있고, 시집으로 《삼인시가집(三人詩歌集)》(공저[共著] 1929)이 있다.

 

14. 남궁벽(南宮璧, 1895~1922): 호는 초몽(草夢), 《폐허》 동인으로 참가 <별의 아픔>, <대지(大地)> 등을 발표했다. 이 때의 시적 경향은 우울하고 감상적인 것이었다. 또한 <오산편신(五山片信)> 등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예찬과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 색채가 농후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 시세계는 감상적 퇴폐적 요소가 많다. 대표작으로 <마(馬)>, <풀> 등이 있다.

 

15. 오상순(吳相淳, 1894~1963): 호는 공초(空超), 단운(彈雲). 도시샤대학(同誌社大學) 종교철학과 졸업, 《폐허》 동인으로 등단, <허무혼(虛無魂)의 선언(宣言)>, <타는 가슴> 등을 발표했다. 이들 작품은 퇴폐주의적 풍조를 대변한다. 즉 어둡고 허무한 폐허(廢墟)를 그 시작의 원천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이라는 평론에서 폐허는 허무나 폐허를 극복하여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폐허의 옹호와 극복론(克服論)을 펴고 있다. 그러나 <허무혼의 선언>, <아시아의 밤>, <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폐로 끝난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항아리>, <해바라기> 등의 작품을 발표, 민족적 염원과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시집으로 《향수(鄕愁)》 《유전(流轉)》 등이 있고 수필집 《일념구진(一念求眞)》 《백팔염주(百八念珠)》 등이 있으며, 사후(死後) 유고(遺稿) 시집으로《공초시집》이 출간되었다.

 

16. 홍사용(洪思容, 1900~47): 호는 노작(露雀), 휘문의숙(徽文義塾) 졸업. 《백조》의 동인이며, 실제적인 주재자(主宰者)였다. 주로 감상적 추억과 향수를 노래했다. 대표적인 시로 <봄은 가더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시악시 마음은>, <그것은 모다 꿈이었지요마는> 등이 있는데, 그 제목이 특이하게 영탄조(詠嘆調)를 띠고 있는 것이 공통이다. 한편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투신하여 「토월회(土月會)」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저서로 《시와 수필》이 있다.

 

17. 이상화(李相和, 1901~43): 호는 상화(尙火), 일본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과 졸업. 《백조》의 대표적 인물로 낭만적 기질과 감상적 풍조를 잘 조화시켜 좋은 서정시를 남겼다. 그는 <나의 침실(寢室)로>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탐미적, 퇴폐적, 도피적 세계에서 눈을 돌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와 같은 경향성을 지닌 작품을 쓰기도 했다. 유고시집(遺稿詩集)으로 《상화(尙火)와 고월(古月)》(백기만 편)이 있다.

 

18. 이장희(李章熙, 1902~28): 호는 고월(古月), 일본 교토중학 졸업, 《금성(金星)》 동인으로 등장하여 예리한 감각적인 시풍(詩風)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고양이의 꿈> 등이 있다. 젊은 나이로 음독자살했다. 그의 유고(遺稿)가 백기만에 의해 정리되어 《상화(尙火)와 고월(古月)》(1951)이라는 책 속에 실려 있다.

 

19. 김소월(金素月, 1902~35): 본명은 정식(廷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배재고보 졸업, 재학 중에 은사(恩師) 김억(金億)에게 시적 재질을 인정받아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1920년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전과(前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을 발표했다. 이 때의 시적 경향은 민요조(民謠調)에 기반을 둔 애상적(哀傷的)인 서정의 세계였다. 아름다운 서정과 고운 가락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1922년부터 주로 《개벽》지에 50여 편에 이르는 시를 발표하여 그의 절정기를 이룬다. 이 때의 대표작으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삭주 구성(朔州 龜城)> 등이 있다. 이들은 민요적 고운 가락에 애수(哀愁)와 한(恨)의 미학(美學)을 담고 있어, 한국의 대표적 민요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영대(靈臺)》 동인으로도 활약 <밭고랑 위에서> 등을 작품을 발표, 독특한 그의 육성으로 노래했다. 시집으로 《진달래꽃》(25)과 《소월시초(素月詩抄)》(김억 편, 39)가 발간되었다.

 

20. 한용운(韓龍雲, 1879~1944): 호는 만해(萬海), 본명은 유천(裕天), 《유심(惟心)》 및 《불교(佛敎)》지를 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시집 《님의 침묵(沈黙)》으로 문인(文人)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불교적 명상(冥想)에 의한 자연애(自然愛)의 몰입과, 관조(觀照)에서 오는 신비적인 것이었다. 즉 불교적 윤회사상(佛敎的 輪廻思想)을 그 바탕에 깔고, 연가풍(戀歌風)의 서정적 정서가 교묘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소설도 집필(執筆)하여 <흑풍(黑風>(1935)과 <후회(後悔)>(36), <박명(薄命)>(38) 등이 있다. 그밖에 《불교대전(佛敎大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이 있다.

 

21. 김기진(金基鎭, 1903~85): 호는 팔봉(八峰). 배재고를 거쳐 일본 릿쿄대(立敎大) 영문과 중퇴. 그는 「파스큘라」에 가입했으며, 《백조》 동인이기도 했다. 이 때 일본 유학 중에 경향문학의 새 이론을 국내에 서신으로 소개했다. 즉 한국문단의 감상적 낭만성을 비판하며 경향파문학도입(京鄕派文學導入)에 선구적 활동을 했던 것이다. 1924년에 시 <백수(白手)의 탄식(歎息)>과 단편 <붉은 쥐> 등을 발표, 신경향파문학(新傾向派文學)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이어서 <불이야 불이야>(25), <젊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의 사(死)>(25) 등의 소설과, 평론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계급문학의 의의>, <조선 프로문예 운동의 선구자> 등 다수를 발표하여 신경향파에서 프로문학으로 발전, KAPF의 이론적 지도자로 크게 활약했다. 30년대에 들어와 역사소설로 전향했다. 저서에 <해조음(海潮音)>(30), <애연모사(愛戀慕思)>(24), <청년 김옥균(金玉均)>(24), <전도해양(前途海洋)>(37)<再發生>(42), <심두잡초(心肚雜草)>(54) 등이 있다.

 

22. 박영희(朴英熙, 1901~?): 호는 회월(懷月). 서울 출신. 배재고보 졸업, 일본 정규영어학교(正規英語學校) 수학. 《장미촌》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여 <꿈의 나라>, <객(客)> 등의 상징적 경향의 서정시를 발표했다. 그 후 《개벽》지에 단편 <사냥개>와 평론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 등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전환했다. 1925년 KAPF를 조직, 그 중앙위원이 됐고, 목적의식론(目的意識論)을 제창하는 등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여 프로문학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카프 내부에서 프로문학론이 대립되자 <최근문예이론의 전개와 그 경향>(34)을 발표하면서 순수파로 전향(轉向)했다. 그는 일제 말 신체제문학(新體制文學)에 협조하여, 광복 후 민족반역자의 명단에 올랐고, 사변 중에 납북(拉北)됐다. 저서로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37)와 《소설 평론집》(20), 《문학의 이론과 실제》(47), 《초창기문단측면사(草創期文壇側面史)》 등이 있다.

 

23. 최학송(崔鶴松, 1901~32): 호는 서해(曙海). 일찍 부모를 잃고 간도(間島)지방을 유랑하며 빈천(貧賤)한 직업을 전전하며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귀국하여 《조선문단》에 단편 <고국(故國)>으로 추천을 받았고, <탈출기(脫出記)>(25)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신경향파문학이 유행하던 당시, 빈궁(貧窮)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많은 갈채를 받고 중견작가(重堅作家)의 위치를 확보했다. 「가진 자」에게 도전하는 「가지지 않은 자」의 반항의지(反抗意志)를 주제로 삼고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적 생리(體驗的 生理)에서 나온 자연발생적인 특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직설적이고 박진력(迫進力) 있게 구사한 체험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서전적 요소(自敍傳的 要素)가 강했던 것이다. 작품으로 <박돌(朴乭)의 죽음>(25), <기아(飢餓)와 살육(殺戮)>(25), <큰물 진 뒤>(25), <홍염(紅焰)>(27), <낙혼불우(落魂不遇)> 등과 단편집 《혈흔(血痕)》이 있다.

 

24. 이익상(李益相, 1895~1930): 전북 출생. 호는 성해(星海). 「파스큘라」 동인으로 신경향운동에 참가했으며, KAPF의 발기인(發起人)이 되었다. 그의 대표작 <狂亂>(25)은 금전만능의 속된 사회를 풍자비판(諷刺批判)한 소설이다. 그는 <생활을 위한 예술>이란 논문처럼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문학관을 주장했다. 소설로 <흙의 세례(洗禮)>(26), <구속(拘束)의 첫날>(25), <쫓기어가는 이들>(26), <위협의 채찍>(26) 등이 있다.

 

25. 조명희(趙明熙,1894~1938): 호는 포석(抱石). 처음에는 시를 쓰기 시작, <영혼의 한쪽 기행>, <잔디밭 위에서> 등을 발표했으나, 《조선지광(朝鮮之光)》지(誌)에 소설 <저기압(低氣壓)>, <동지(同志)>, <한 여름 밤>, <낙동강(洛東江)> 등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았다. 그의 소설은 정치적인 목적의식은 짙으나 예술성은 희박하다. 단편으로 <땅 속으로>(25), <농촌 사람들>(26),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들>과 시집 《봄 잔디밭 위에》 등이 있다.

 

26. 이기영(李箕永, 1896~?): 호는 민촌(民村). 충남 아산 출생. 일본 도쿄세이소쿠(東京正則)영어학교 중퇴. KAPF의 중앙위원. 1924년 《개벽》에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秘密片紙)>가 당선되어 등단. 이어 <가난한 사람들>(25), <쥐 이야기>(26), <농부 정도령(農夫 鄭道令)>(26), <강동지 아들>(1926) 등을 발표해, 프로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었다. 그의 농촌소설은 궁핍(窮乏) 문제와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어 프로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 <고향(故鄕)>은 식민지시대 한국농촌소설로 프로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장편으로 <서화(鼠火)>(33), <인간수업(人間修業)>(36), <신개지(新開地)>(38), <대지(大地)의 아들>(39), <광산촌(鑛山村)>(43)과 단편으로 <아사(餓死)>(27), <해후(邂逅)>(27), <홍수(洪水)>(30), <흙과 인생>(36) 등이 있다.

 

27. 한설야(韓雪野, 1901~?): 본명은 병도(秉道). 함흥고보(咸興高普)를 거쳐 일본(日本)대학 사학과(史學科) 졸업. 1925년 《조선문단》에 <그 날 밤>으로 데뷔한 후, 카프에 참가하여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등의 평론을 발표했고, 단편 <뒷걸음질>(27), <과도기(過渡期)>(29), <씨름>(29) 등을 발표했다. 대중문화론(大衆文化論)이 강조되고, 프로문학의 볼셰비키화의 과정을 통하여 작품 활동이 강조된 시기에 발표된 이 작품들은 이 당시 프로문단이 거둔 성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작품 자체로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단편으로 <교차로(交叉路)>(33),<태양(太陽)>(36), <임금(林檎)>(同年), <철도교차로(鐵道交叉路)>(36), <부엌>(37), <이녕(泥濘)>(39), <술집>(39), <모색(摸索)>, 장편으로 <황혼(黃昏)>(36), <탑(塔)>(40), <마음의 향촌(鄕村)>(39), <청춘기(靑春期)>(39) 등이 있다. 그는 광복 후 월북(越北)하여 고위직(高位職)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노무자로 전락했다.

 

28. 김남천(金南天, 1911~53): 본명은 김효식(金孝植). 평양고보(平壤高普)를 거쳐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중퇴. 「제삼전선(第三戰線)」에 가담, 카프 제 2차 방향전환기(方向轉換期)에 귀국했다, 「전투하는 계급의식」으로 대결하여야 한다는 프로문학론을 주장하여, 극좌파(極左派)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 부위원장(副委員長)을 거쳐 월북했으나, 남로당(南勞黨) 숙청 당시 사형되었다. 단편 <소년행(少年行)>(37), <누나와 사진(寫眞)>, <처(妻)를 때리고>, <제퇴선(祭退膳)>, <요지경(瑤池鏡)> 등 자기고발성(自己告發性)이 강한 소설을 발표했다. <창작방법(創作方法)의 전환문제(轉換問題)>, <고발의 정신과 작가>, <관찰문학론> 등의 평론을 통하여 조직화(組織化)를 위한 사회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강조했다. 단편으로 <공장신문(工場新聞)>(31), <공우회(工友會)>(32), <누나의 사건(事件)>(38), <노고지리 우지진다>(40)와 장편으로 <낭비(浪費)>(40), <대하(大河)>(1939), <동맥(動脈)>(46)과 단편집 《3.1 운동》, 《맥(脈)》(1947) 등이 있다.

 

29. 홍명희(洪命熹, 1888~1968): 호는 벽초(碧初). 충북 괴산 출생, 19세에 도일(渡日), 도쿄(東京) 다이세이(大成)중학 졸업.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귀국, 오산중학 교장, 연희전문(延禧專門) 및 중앙불교전문(中央佛敎專門) 교수를 역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주필을 지냈다. 그는 이조 명종시(李朝 明宗時) 실존인물이었던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임꺽정전(林巨正傳)>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임꺽정을 긍정적으로 그린 장편으로 풍부한 한국어의 구사, 이조풍속(李朝風俗)의 전개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또 《신흥문학(新興文學)의 운동(運動)》(26), 《이조문학논의(李朝文學論義)》(38), 《려이전설(驢耳傳說)》 등을 발표했다. 수필 <명말사담(明末史談)>을 쓰기도 했고, 크라이스트의 소설 <거지와 노파>를 번역하기도 했으나, 작품은 <임꺽정전(林巨正傳)> 한 편이다. 이 소설은 1928년 말부터 1936년 3월까지 두 번씩 중단하면서도 미완(未完)된 작품이다. 1939년에 조선신문사에서, 1948년에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했다. 월북 후 사망(死亡).

 

30. 이태준(李泰俊, 1904~?): 호는 상허(尙虛). 철원 출생.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데뷔. 이어서 <누이>(29), <가마귀>(30), <불도 나지 않았소>(31), <불우선생(不遇先生)>(32), <달밤>(33), <색씨>, <복덕방(福德房)>(37), <패강랭(浿江冷)>(38), <영월영감(寧越令監)>(39), <밤길>(40) 등의 역작(力作)을 발표하여, 30년대 대표적 작가로 활약했다. 그는 <구인회(九人會)> 회원이었으며, 《문장(文章)》지 편집 겸 소설 추천위원이기도 했다. 그는 탁월한 미문장가(美文章家)로, 간결한 서술구조(敍述構造)를 통하여 선명한 인간상(人間像)을 제시하는, 기교에 능한 소설가였다. 따라서 그를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보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은 상고주의(尙古主義)와 연민(憐憫)의 정조(情操)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희망을 일은 노인(老人)들이 그의 소설에 많이 등장한다. 노인은 인간의 골동품이며, 현재보다 과거에 산다. 이렇게 과거지향적(過去指向的)이며, 몰락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한 시대 소멸(消滅)의 양태를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센티멘털리즘과 통한다. 그의 소설이 패배적(敗北的) 인간상을 제시하며, 사상(思想)이 빈곤하고, 역사의식(歷史意識)이 결핍되었다고 비판받기도 했으며, 그만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상치된다. 그러나 그는 월북했다. 저서에 단편집 《달밤》, 《가마귀》, 《이태준단편집(李泰俊短篇集)》, 《복덕방(福德房)》,《돌다리》 등과 장편으로 <황진이(黃眞伊)>, <제이(第二)의 운명(運命)>, <청춘무성(靑春茂盛)>, <딸 삼형제>, <왕자호동(王子好童)> 등이 있다.

 

31. 이효석(李孝石, 1907~42): 호는 가산(可山).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와 경성제대(京城帝大) 졸업. 대학 재학 중 28년에 <도시(都市)와 유령(幽靈)>으로 데뷔. 이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했다. 이들 작품은 노동자의 생활을 다루는 등 하층민에 대한 관심을 보여, 동반작가(同伴作家)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33년 <돈(豚)>, <수탉> 등을 발표하면서, 종래의 경향성(傾向性)을 탈피하여 자연과 인간의 본능적 순수성(純粹性)을 추구했다. 특히 성적 관능미학(官能美學)과 시적 리리시즘이 조화를 이루어 30년대 낭만주의 문학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메밀꽃 필 무렵>(36), <산(山)>(36), <들>(36), <석류(石榴)> 등을 발표, 성적 묘사와 토착적 자연미를 조화시켜 명성을 얻었다. 단편집 《노령근해(露領近海)》(31), 《성화(聖畵)》(34), 《해바라기》(39), 《李孝石短篇集》(40)과 장편 <화분(花粉)>(42) 등이 있다.

 

32. 최재서(崔載瑞, 1908~64): 호는 석경(石耕). 경성제이고보(京城第二高普)를 거쳐 경성제대 영문과와 동대학원(同大學院) 졸업.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서구시의 소개와 그 이론을 도입(導入)하는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조선일보>에 <현대주지주의의 문학이론건설(文學理論建設)>, <비평과 과학> 등을 발표, 주지주의 문학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T. E. 흄과 T. S. 엘리어트, I. A. 리차드 등의 영미(英美) 모더니즘과 이론을 소개한 그의 활동은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어서 <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35), <현대적 지성(知性)에 관하여>(37), <문학(文學)․ 작가(作家)․ 지성(知性)>(38), <빈인(貧因)과 문학>(37) 등을 발표하여, 문학이 나아갈 방향과 창작방법을 제시했다. 후기에 《국민문학지(國民文學誌)》를 주재하면서 일제(日帝)의 신체제 운동(新體制 運動)에 동조하여, 《전환기의 조선문학》이란 평론집을 일문(日文)으로 간행했다. 저서에 《문학(文學)과 지성(知性)》(38), 《문학원론(文學原論)》(57) 등이 있다.

 

33. 이상(李箱, 1910~37):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보성고(普成高)를 거쳐 경성공고(京城工高) 건축과 졸업. 1931년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그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烏瞰圖)>를 발표, 문단과 독자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시는 매우 전위적(前衛的)이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超現實主義的)인 특징을 강하게 드러낸 실험의식(實驗意識)이 강한 일련의 시를 시도한 그는,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自意識)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이어서 <종생기(終生記)>, <조춘 점묘>, <지주회시>, <동해(童骸)>, <실화(失花)>,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했다.

 

34. 박태원(朴泰遠, 1909~86): 호는 구보(仇甫)로, 한의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큰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소년기에 고대소설을 통독했다. 경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보 졸업했다. 그는 고보 재학 중에 춘원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문단』에 시「누님」의 당선을 시작으로 시를 비롯해 평론, 수필 등을 발표, 폭넓은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고보 졸업 후,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2 년만에 중퇴, 귀국하여 작품 활동에 전념, 단편「수염」(30)을 비롯해 <옆집 색씨>(33), <사흘 굶은 봄달>(33),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월(一日)>(34) 등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도시 지식인의 무료한 일상(日常)을 순차적으로 제시한 중편이다. 이어 「芳蘭莊 主人」(38) 등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발표한 전위적인 작가요 독특한 스타일리스트였다. 그의 대표작 <천변풍경(川邊風景)>(36)에 이점이 잘 드러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없고, 기본 줄거리가 없으며, 삽화의 나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재래적 의미(在來的 意味)의 plot을 해체시킨 소설이다. 이 작품은 독특한 스타일로 도시인의 생활양태를 객관적(客觀的)으로 묘사하여, 가시적(可視的) 세계의 수용(受容)을 극대화(極大化)했고, 시점(視點)의 수평 이동으로 외현적 묘사(外顯的 描寫)를 다각화(多角化)시켰다. 그밖에<성탄제(聖誕祭)>(37), <우맹(愚氓)>(38), <최노인전(崔老人傳)>(39), <아시아의 여명(黎明)>(41) 등이 있다.

6.25전쟁 중 월북한 뒤에 북한의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전속 작가로 <조선창극집>을 공동 집필했다. 남로당계로 몰려 숙청당했다 복권되어 죽을 때까지 소설을 섰다.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63)를 발간했고, 65년 실명 75년 고혈압으로 전신 불수, 구술로 「갑오농민전쟁」(77-86)을 완성했다.

6.25전쟁 중 월북한 후 북한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전속 작가로 <조선창극집>을 공동 집필했다. 남로당계로 몰려 숙청당했으나 복권되어 죽을 때까지 창작 활동을 지속했다.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63)를 썼다. 65년에 실명, 75년에 고혈압으로 전신 불수되어 병상에서 구술로 「갑오농민전쟁」(77~86)을 완성했다.

 

35. 최명익(崔明翊, 1908~?): 평양 출생. 36년 《조광(朝光)》에 <비 오는 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나, 중앙문단과는 별로 접촉 없이 《단층》의 동인으로만 활동했다. 그의 대표작은 <심문(心紋)>이다. 이 소설은 식민지 지식인의 허무적 전락과 파멸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으로 다루고 있는 심리소설(心理小說)이다. 이렇듯 자의식(自意識) 과잉의 인간과 병리적 상황 제시를 통하여 닫혀진 사회의 답답한 시대 징후를 그렸다. 그는 지식계급의 불만의식(不滿意識)을 다루고 있어 이상(李箱)의 소설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작품으로 <무성격자(無性格者)>(37), <역설(逆說)>(38), <폐어인(肺魚人)>(39), <장삼이사(張三李四)>(41) 등이 있다.

 

36. 유진오(兪鎭午, 1906~87): 호는 현민(玄民).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졸업.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스리>, <파악(把握)>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어 <5월의 구직자>, <첫경험>, <여직공>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특히 빈민계층을 제재(題材)로 한 경향성의 작품이어서 동반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고, <김강사(金講師)와 T교수>(1935)의 경우처럼, 지식인의 고민상(苦悶像)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변모는 그의 대표작 <창랑정기(滄浪亭記)> 등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작자의 유년시절(幼年時節)을 그린 사소설(私小說)로, 인텔리층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런 점은 장편 <화상보(華想譜)>도 유사하다. 또 <신진에게 갖는 기대>, <문단신인군> 등의 평론을 발표, 신인들을 비판하였으며, 김동리(金東里)와 논전(論戰)을 벌였다. 저서에 《유진오 단편집》, 《봄》 등의 단편집과 《구름 위의 만상(漫想)》 등이 있다.

 

37. 안수길(安壽吉, 1911~77): 호는 남석(南石). 와세다(早稻田)대학 중퇴.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赤十字病院長)>이 《조선문단》에 당선되며 데뷔. 그 후 만주로 가서 동인지(同人誌) 《북향(北鄕)》을 간행했다. 이어서 <벼>(40), <목축기(牧畜記)>(42), <원각촌(圓覺村)>(42) 등을 썼다. 해방 후 귀국하여, <여수>, <밀회(密會)>, <초연필담(初戀筆談)> 등을 발표했다. 그의 단편은 대체로 소시민의 양심이 각박한 현실에서 겪는 갈등을 소박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하여 장편 <북간도(北間島)>(59)는 우리 민족의 근대 수난사(近代 受難史)를 다룬 건실한 역작(力作)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에 단편집 《북원(北原)》(43), 《제삼 인간형(第三 人間型)》(54), 《풍차(風車)》(63), 《벼》(65) 등이 있고, 장편으로 <먼 후일>(54), <제 4의 청춘>(57), <백야(白夜)>(64) 등이 있다.

 

38. 김정한(金廷漢, 1908~96): 호는 요산(樂山).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부속 제1학원 중퇴. 1936년 <조선일보>에 <사하촌(寺下村)>이 당선되어 등단. 이어 <옥심이>, <낙일홍(落日紅)>, <추산당(秋山堂)과 곁 사람들> 등의 단편을 발표하여, 저항적(抵抗的) 색채를 보였다. 일제말기(日帝末期)부터 절필(絶筆)하였다가, 1966년에 단편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다시 시작하였다. <과정(過程)>, <평지>, <굴살이>, <뒷기미 나루> 등의 단편과 중편 <수라도(修羅道)> 등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낙동강(洛東江) 주변의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서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민중 속에 잠재된 가능성(可能性)을 추구하여 농민문학(農民文學)의 새로운 지평(地平)을 개척하였다. 이외에도 <지옥변>, <독메>, <인간단지>, <산거족> 등의 단편이 있다.

 

39. 채만식(蔡萬植, 1902~50): 호는 백릉(白菱).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중퇴. 1925년에 단편 <세 길로>로 데뷔, 이어 <사라지는 그림자>, <부촌(富村)>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동반자적(同伴者的) 경향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텔리와 빈대떡>(34), <레디메이드 인생>(34)부터 변모되어 풍자소설(諷刺小說家)에 재능을 보여 주었다. 사소설적(私小說的) 요소가 짙은 이 소설은 지식인 사회의 약점과 고뇌를 풍자적 필치(筆致)로 파헤쳤다. 그의 대표작으로 <탁류(濁流)>(37)와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38)을 들 수 있다. 세태묘사적(世態描寫的) 리얼리즘이 탁월한 <탁류(濁流)>와 풍자성이 짙은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은 도시인들의 욕망과 타락과 악덕으로 인한 파멸 등을 추구하고 있다. 작품으로 <여자의 일생(一生)>, <아름다운 새벽>, <옥랑사(玉娘祠)> 등이 있다.

 

40. 김유정(金裕貞, 1908~37): 휘문고보(徽文高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중퇴. 1935년 <조선(朝鮮)>․<중외일보(中外日報)>에 <소낙비>, <노다지>가 각각 당선되어 데뷔. 이후 별세(別世)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에 <금 따는 콩밭>, <봄봄>, <만무방>, <동백꽃>, <따라지> 등 30여 편의 단편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소설에 우직한 인물들이 잘 등장한다. 좀 모자라고 의외적인 그들의 행동으로 해학미(諧謔美)가 살아난다. 육담(肉談)과 비어(卑語)․속어(俗語)의 특이한 문체(文體)는 골계미의 효과를 가져온다. 그는 농촌 문제를 많이 노출시키지만, 이를 현장의 아픔으로 제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환치(換置)시키고 있어, 해학미가 넘치는 향토적 서정(鄕土的 抒情)을 이루고 있다. 단편집으로 《동백꽃》(인창서관[仁昌書館], 38)이 있다.

 

41. 정비석(鄭飛石, 1911~91): 본명은 서죽(瑞竹). 일본대학(日本大學) 중퇴. 처음에 시(詩)로써 출발했으나, <졸곡제(卒哭祭)>, <성황당(城隍堂)>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로 전향(轉向)했다. 세련된 문장에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잘 묘사하여 독자의 인기를 얻었다. 그의 사랑의 미학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질 때는 원시적(原始的) 건강성(健康性)과 소박(素朴)함을 지니고 있었으나, 도시적 환경으로 바뀌면서 속된 에로티시즘으로 타락한 느낌을 주어 문단으로부터 멀어졌다. 저서로 <성황당>, <고원(故苑)>, <파도(波濤)>, <제신제(諸神祭)>, <장미의 계절>, <청춘윤리>, <파계승>, <자유부인> 등 다수.

 

42. 김동리(金東里, 1913~95): 본명은 시종(始鍾). 경신고보(儆新高普) 중퇴. 1934년부터 매년 시(詩) <백로>와 소설 <화랑의 후예>, <신화>가 각각 신문에 당선되어 데뷔. 이어 <무녀도>, <바위>, <향토기> 등을 발표, 토속적(土俗的) 샤머니즘의 세계를 즐겨 다뤘다. 그의 소설에 역사의식이 없으며, 원시적 토속신앙이나 설화적(說話的) 모티브가 잘 등장하여, 신화세계(神話世界)로 강한 회귀성을 드러내고 있다. <순수이의(純粹異議)>, <신세대 문학정신> 등의 논문을 발표, 자신의 문학에 대한 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또 해방 후 좌․우익(左․右翼) 투쟁에 참여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하기도 했고, 문학단체(文學團體)에도 많이 관여했다. <흥남철수>, <밀다원시대>, <실존무> 등을 발표하면서 변모를 보여 주었다. 즉 한국적 현실에도 시야(視野)를 확대했다. 저서에 《무녀도》, 《황토기》, 《역마》, 《귀환 장정》, 《실존무》, 《등신불》 등의 단편집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十字架)》, 평론집 《문학과 인간》 등이 있다.

 

43.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숭실중학(崇實中學)을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졸업. 초기에 시를 써서, 1936년에 시집 《방가(放歌)》를 출간했으나, 1940년 《늪》을 간행하면서 소설에 전념했다. <목넘이 마을의 개>, <독 짓는 늙은이

>, <별>, <곡예사>, <과부>, <필묵장수> 등의 단편을 발표, 간결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을 통하여 인간 본연(人間 本然)의 품성을 중요시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후 <별과 같이 살다>, <카인의 후예(後裔)>(54), <인간접목(人間接木)>(57), <나무들 비탈에 서다>(60), <일월(日月)>(62), <움직이는 성(城)>(68) 등의 장편을 발표하며 문학세계를 확대해 나갔다. 즉 공산치하(共産治下)의 잔학상(殘虐相)을 고발하는가 하면, 고아원(孤兒院)의 암흑상을 파헤치기도 하고 6․25 사변으로 상처받은 젊은이들의 고뇌(苦惱)를 제시하기도 하고, 현대인들의 숙명적 고뇌를 다루기도 하며 전래적(傳來的)인 사상과 외래적(外來的)인 사조(思潮)의 융합을 추구하기도 했다.

 

44. 허윤석(許允碩, 1914~95): 1935년 《조선문단》에 소설 <사라진 무지개와 오뉘>로 데뷔, 이듬해 시 <밀밭 없는 동리>가 당선되었다. 해방 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시 <하일(夏日)>, 단편 <실락원>, <비는 구름장마다>, <옛 마음>, <해녀> 등을 발표했다. 그는 스타일에 중점을 두어 사건 없이 시적 요소를 곁들인 새로운 접문(接文)을 구축하는 데 노력했다. 작품으로 <조사(釣師)와 기러기>, <구관조(九官鳥)>, <초인> 등이 있다.

 

45. 최정희(崔貞熙, 1912~90): 숙명여고(淑明女高)를 거쳐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 졸업. 1931년 《삼천리(三千里)》에 <정당한 스파이>, <램프> 등을 발표하였으나, 작가적 재능을 인정받기는 <곡상>(38)에서부터였다. 이후 <정적기(靜寂記)>, <인맥(人脈)>, <지맥(地脈)>, <천맥(天脈)>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일기체의 고백적인 수법을 써서, 여류 작가 특유의 섬세한 면모를 보였다. 초기의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에서 후기는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한다. 이렇게 사회의식을 반영한 작품은 <점례>, <풍류 잡히는 마을>, <우물치는 풍경>, <청량리역>, <바람 속에서>, <추락된 비행기>, <수난의 장> 등이다. 장편 <녹색의 문>, <인생의 찬가>, <인간사>, <강물은 또 몇 천리> 등이 있다.

 

46. 박화성(朴花城, 1904~88): 본명 경순(景順), 호는 소영(素影). 일본여대(日本女大) 영문과 수료. 1925년 단편 <추석전야(秋夕前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등장, <백화(白花)>(31)로 작가적 위치를 확보했다. 이어 <하수도공사(下水道工事)>, <홍수전야(洪水前夜)>, <논갈 때>, <한귀(旱鬼)>, <고향 없는 사람들> 등을 발표, 동반자적 성향을 보였으나, 해방 후 장편에 몰두 <고개를 넘으면>, <하늘이 보이는 풍경>, <내일의 태양>, <타오르는 별>, <거리에는 바람이> 등을 발표했다.

 

47. 함대훈(咸大勳, 1907~49): 호는 일보(一步). 동경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노어과(露語科) 졸업. 해외문학연구회원(海外文學硏究會員) 극예술연구회동인(劇藝術硏究會同人)으로 러시아문학의 번역 소개에 힘썼다. 1933년 <전향(轉向)>, <다방>, <시베리아> 등을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봄․사랑․죽음>, <첫사랑>, <우정>, <항구>, <호반>, <묘비> 등의 단편과 장편 <순정해협>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그만큼 통속적(通俗的)인 요소가 많다.

 

48. 한인택(韓仁澤, 1903~37): 호는 보운(步雲). 보성고보(普成高普) 중퇴. 1931년 장편 <선풍시대>가 당선되면서 데뷔.

 

49. 안회남(安懷南, 1910~?): 본명은 필승(必承). 부친(父親)은 신소설가 안국선(安國善). 「개벽」사의 사원으로 있으면서, <모자(母子)>(30), <발(髮)>, <그들 부부>(31) 등을 발표하면서 데뷔.

 

50. 박노갑(朴魯甲, 1905~51): 호는 도촌(島村).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법정대(法政大) 졸업.

 

51. 최인욱(崔仁旭, 1920~72):본명은 상천(相天), 호는 하남(河南). 일본대학(日本大學) 종교과 중퇴, 1938년에 <시들은 마을>이, 이듬해 <산신령(山神靈)>이 각각 입선되면서 데뷔.

 

52. 김광주(金光洲, 1910~73): 필명은 평(萍),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상해(上海) 남양의대(南洋醫大) 중퇴. 1933년 <밤이 깊어갈 때>를 발표하여 데뷔.

 

53. 정지용(鄭芝溶, 1902~50): 충북 옥천 출생. 휘문고보 및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英文科) 졸업. 그는 《시문학(詩文學)》 동인,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두주자, 「구인회(九人會)」 회원, 《문장(文章)》지 추천위원, 《카톨릭 청년(靑年)》 편집고문 등의 족적(足跡)이 말해주듯 폭넓은 문학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특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언어구사와 간결한 이미지의 참신한 수법이 뛰어나,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3기로 구분된다. 초기시는 이국정조(異國情調)와 향수의식(鄕愁意識)이 공존(共存)하여 서정적 갈등을 이루고 있다. 중기시는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계열과 카톨릭시즘을 시화(詩化)한 계열로 양분된다. 후기시는 정밀(靜謐)한 산수(山水)의 세계를 고담(枯淡)하게 표현하고 있어, 자연과 합치(合致)된 허정미(虛靜美)와 여운(餘韻)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초기와 중기의 시적 성격은 《정지용시집(鄭芝溶詩集)》(35)에 나타나 있고, 후기의 시적 특성은 《백록담(白鹿潭)》시집에 잘 나타나 있다. 6․25 동란 중에 납북(拉北)되었다. 그밖에 《지용시선(芝溶詩選)》(46)과 수필집으로 《문학독본(文學讀本)》(박문출판사[博文出版社], 48)과 《산문(散文)》(동지사[同志社], 49) 등이 있다.

 

54. 백석(白石, 1912~95): 본명은 기행(夔行), 평북 정주 출신. 오산중학을 거쳐 도쿄(東京) 아오야먀(靑山)학원 졸업, 귀국(歸國)하여 조선일보에 근무하며 처녀 시집 《사슴》(36)을 출간했다. 그는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소박한 시골 풍경을 그리고 있어 「민속호벽(民俗好僻)」이란 평을 받기도 했다. 그의 시에 송구떡, 달송편, 무이징게국, 돌나물 김치, 청밀, 찹쌀탁주 등 토속 미각(土俗 味覺)을 상징하는 음식명(飮食名)이 많이 씌어지고 있었으며, 민담(民談)이나 야담(野談)의 줄거리가 있어, 지방색채와 민속화적(民俗化的)인 것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시학(詩學)은 향토적이며 민속적인 세계에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작품에 시 <통영(統營)>(36), <창원가도(昌原街道)>, <고성가도(固城街道)>, <추야일경(秋夜一景)>, <석양(夕陽)>, <고향(故鄕)>, <적막강산(寂寞江山)>(47),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學風)》창간호 48) 등이 있다.

 

55. 김기림(金起林, 1908~?): 호는 편석촌(片石村) 또는 G.W. 함북 성진 출생. 보성고보 중퇴, 일본대학(日本大學) 문학예술과(文學藝術科) 졸업. 서울대 조교수(助敎授), 신문화연구소장(新文化硏究所長)에 재직 중 납북되었다. 그는 1931년에 시 <고대(苦待)>, <날개도치면>을, 이듬해 <오 어머니여>, <봄은 전보도 안 치고>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선명한 이미지의 조형(彫形)에 힘썼다. 특히 I.A. 리처즈의 이론을 도입, 모더니즘 운동의 기반을 닦아 시론가(詩論家)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의 주장은 감상성을 배격하고 문명비판(文明批判)의 정신을 앙양하고 메카니즘적 참여를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펼친 모더니즘 이론을 시 창작에 반영시켜, <바다와 향수>(35), <기상도(氣象圖)>(35), <야행열차(夜行列車)>(36), <기관차(機關車)>와 같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들 작품에 그가 주장한 주지성(主知性)과 회화성(繪畫性)과 문명비판의 태도와 과학정신(科學精神) 등을 반영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현저히 나타나 있다. 그는 모더니즘 시론을 전체시론으로 발전시켰다.

저서로 시집 《기상도(氣象圖)》(36) 《태양(太陽)의 풍속(風俗)》(39) 《새노래》(47) 《바다와 나비》(46)와 시론집 《시(詩)의 이해(理解)》, 《시론(詩論)》, 《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 등이 있다.

 

56. 김광균(金光均, 1913~93): 개성 출생. 송도상고(松都商高) 졸업. 회사에 근무하며 시를 썼다. 1930년에 <야경차(夜警車)>, <소식(消息)> 등을 발표하면서 데뷔. 이후 <부두>, <성호부근>, <와사등(瓦斯燈)>, <외인촌(外人村)>, <설야(雪夜)> 등을 발표, 이미지즘의 경향이 현저한 시를 썼다. 김기림(金起林)이 도입한 영, 미(英, 美)이미지즘에 영향을 받아, 그는 특히 「시는 회화(繪畫)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에 충실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적 모더니즘 계열에 속하지만 감상적(感傷的) 요소도 짙다. 소시민적 애상(小市民的 哀傷)의 빛깔을 띠기도 하며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造形)을 시도하였다. 시집에 《와사등(瓦斯燈)》,《기항지(寄港地)》 등이 있다.

 

57. 김영랑(金永郞, 1903~50): 전남 강진 출생, 휘문의숙(徽文義塾)을 거쳐 일본 아오야먀(靑山)학원 영문과 중퇴. 30년 《시문학(詩文學)》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등을 발표하여 시단(詩壇)에 등장, 이어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봄길 위에서>, <내 마음을 아실이>, <봄 달>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는 섬세하고, 청징(淸澄)한 정서(情緖)가 독특한 시형(詩型) 속에 담겨져 있으며, 현묘한 운율과 조탁(彫琢)의 시어가 조화를 이루어 순수서정시(純粹抒情詩)의 진경을 보여준다. 30년대 정지용(鄭芝溶)과 쌍벽을 이루며 한국 시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다. 저서로 《영랑시집(永郞詩集)》(35)이 있다.

 

58. 이육사(李陸史, 1905~44): 본명은 원록(源祿). 경북 안동 출생. 중국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회학과 중퇴. 《신조선(新朝鮮)》에 <황혼(黃昏)>(33)을 처음 발표하였다. 이어 《자오선(子午線)》의 동인으로 <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 <파초(芭蕉)> 등을 발표, 서정성이 풍부한 목가풍(牧歌風)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광야(曠野)>, <절정(絶頂)>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일제하 한민족의 비운(悲運)을 제재(題材)로 하여 강렬한 귀향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멸(不滅)의 민족혼(民族魂)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생전에 17회나 투옥(投獄)된 전기적(傳記的)인 사실과도 일치되고 있다. 유고(遺稿)시집으로《육사시집(陸史詩集)》(46)이 있다.

 

59. 서정주(徐廷柱, 1915~2000):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 출신. 중앙불교전문(中央佛敎專門) 졸업. 1936년에 시 <벽(壁)>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이 해 동인지(同人誌) 《시인부락(詩人部落)》을 편집, 간행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초기 시는 가혹한 원죄의식(原罪意識)과 강렬한 생명추구(生命追究)에 바탕을 두고, 인생의 업고(業苦)와 비운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작품이 <자화상(自畵像)>, <문둥이>, <화사(花蛇)> 등이다. 그러나 제2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에서는 초기의 격려한 세계에서 변모되어 동양정신의 세계로 접근하여 갔다. 불교사상을 기조로 하고 신라의 설화(說話)를 제재로 영생(永生)적 이념과 신비(神秘)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 <무등에서>, <학(鶴)> 등이 있다. 저서에 《화사집(花蛇集)》(41), 《신라초(新羅抄)》(61), 《서정주시선(徐廷柱詩選)》 《동천》(61), 《질마재신화(神話)》 등의 시집과 《시문학개론(詩文學槪論)》 《한국의 현대시》 등의 논저가 있다.

 

60. 조지훈(趙芝薰, 1920~68): 본명은 동탁(東卓). 경북 영양 출신. 혜화전문(惠化專門) 졸업. 《문장(文章)》지에 <승무(僧舞)>, <고풍의상(古風衣裳)>, <봉황수(鳳凰愁)>로 지용(芝溶)의 추천을 받고 데뷔. 그의 초기 시는 회고적 민속적인 것을 제재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와 불교적 선미(禪味)를 표현했다. 그러나 6․25 이후 조국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평필(評筆)도 들어 민족문학의 입장을 고수했다. 국학(國學)연구에도 관심이 깊었다. 저서로 시집 《청록집(靑鹿集)》(공저 46), 《풀잎단장》(52), 《조지훈시초(趙芝薰詩抄)》(56), 《역사(歷史) 앞에서》(59), 《여운(餘韻)》 등이 있고, 《창(窓)에 기대어》 《시(詩)와 인생(人生)》 《돌의 미학(美學)》 등의 수필집과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시(詩)의 원리(原理)》 《지조론(志操論)》 《채근담(菜根譚)》(역서[譯書]) 등이 있다.

 

61. 박두진(朴斗鎭, 1916~98): 호는 혜산(兮山), 경기 안성 출신. 《문장(文章)》지에 <향현(香峴)>, <묘지송>, <낙엽송>으로 추천받고 데뷔. 그의 초기 시는 주로 산을 중심으로 참신한 자연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차츰 변모하여 사회현실에 대한 불굴(不屈)의 신념(信念)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모를 통하여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이다. 그의 기독교적 염원은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조화에 닿아 있다. 저서로 《청록집(靑鹿集)》(공저 46), 《해》, 《오도(午禱),》 《박두진시선(朴斗鎭詩選)》, 《거미와 성좌(星座)》, 《인간 밀림(人間密林)》, 《하얀 날개》, 《청록집 이후(靑鹿集 以後)》(공저) 등의 시집과 연작시집 《수석열전(水石列傳)》과 시론집 《한국현대시론(韓國現代詩論)》 등이 있다.

 

62. 박목월(朴木月, 1917~78): 본명은 영종(泳鍾), 경북 경주 출생. 《文章》지에 지용(芝溶)의 추천으로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산그늘>, <가을 어스럼> 등을 발표하여 데뷔. 향토성이 짙은 간결한 이미지에 섬세한 서정이 담겨있는 것이 초기시의 특징이다. 첫 시집 《산도화(山桃花)》(54)에도 이 점에 잘 잘 나타나 있다.

이 후 소박하고 담담한 생활상을 반영시키고 있는 세계로 바뀐다. 이런 변모는 시집 《난(蘭) 기타(其他)》, 《청담(晴曇)》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과 《사력질(砂礫質)》에서 그의 시가 역사적, 사회적 현실로 확대된 경지를 보인다. 또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관념성(觀念性)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밖에 시집 《청록집(靑鹿集)》(공저 46), 수필집 《구름의 서정》,《토요일의 밤하늘》, 《행복의 얼굴》,《보랏빛 소묘》 등과 동시집(童詩集) 《산새알 물새알》, 《초록별》, 《사랑집》 등이 있다.

 

63. 윤동주(尹東柱, 1917~45): 북간도 명동촌 출생. 연희전문(延禧專門) 졸업.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재학 중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옥사(獄死). 1948년 유고(遺稿)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어 크게 脚光을 받았다.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어둠 속에서 민족의 아픔과 시대의 어려움을 개인적 고뇌로 형상화함으로써, 궁핍한 시대를 살다간 당대인(當代人)들의 정신적 위상(位相)을 극명하게 보여주어 암흑기(暗黑期) 문학의 빛나는 별로 평가되고 있다.

 

64. 김광섭(金珖燮, 1905~79): 호는 이산(怡山), 함북 경성 출생. 중동(中東)학교 및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 졸업. 《해외문학(海外文學)》과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회원. 처녀시집 《동경(憧憬)》(37)에서는 지식인의 시대적 고뇌를 관념적으로 노래하였다. 제2시집 《마음》(49)은 시대적 불안과 우울을 관념화하였다. 이외에 시집 《해바라기》(57), 《성북동 비둘기》(69) 등이 있다.

 

65. 김상용(金尙鎔, 1902~51): 호는 월파(月坡), 경기도 연천 출생.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동아일보>에 <무상(無常)>,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하여 데뷔, 그의 시는 동양인의 관조(觀照)의 세계가 평담(平淡)하게 그려진 데 그 특색이 있다. 그의 대표적 작품 <남으로 창(窓)을 내겠소>와 같이 적극적으로 현실을 말하지 않는 반면에 시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시가 많다. 시집으로 《망향(望鄕)(39)》이 있다.

 

66. 신석정(辛夕汀, 1907~74): 본명은 석정(錫正). 전북 부안 출생. 1930년 《시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농촌에 살면서 자연에 귀의(歸依)하는 자세로 목가적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슬픈 구도(構圖)> 등이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촛불》(39), 《슬픈 목가(牧歌)》(47), 《빙하(氷河)》(56), 《산(山)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70) 등이 있다.

 

67. 노천명(盧天命, 1913~57): 황해도 장연 출생.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과 졸업. 처녀시집 《산호림(珊瑚林)》(38)에 나타나 있듯이, 그녀의 시세계는 고독(孤獨)과 애수(哀愁)의 주정(主情)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소박한 삶의 건강성을 잃지 않고 있다. 대표작으로 <사슴>, <푸른 오월>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창변(窓邊)》(45), 《별을 쳐다보며》(53), 《사슴의 노래》(58) 등이 있다.

 

68. 함형수(咸亨洙, 1916~46): 함북 경성 출생. 혜화전문(惠化專門) 졸업, 동인지 《시인부락》을 통하여 <해바라기의 비명

(碑銘)>, <홍도(紅桃)> 등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생활도 그러한 일면이 있었지만 시도 퇴폐적인 면이 많았다. 그는 소년적인 동경(憧憬)과 애수와 꿈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집은 없고, 대표작으로 <해바라기의 비명> 그 밖에 <개아미와 같이>, <무서운 밤>, <해골의 추억> 등이 있다.

 

69. 오장환(吳章煥, 1916~?): 충북 회인 출신, 휘문고보를 중퇴. 1936년에 <조선일보>에 <성씨보(姓氏譜)>, <역(易)>, <향수(鄕愁)>, <면사무소>, <수부(首府)>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 그의 시는 리듬과 이미지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직접 현실 속에 들어가서 현대의 심연(深淵)을 반영(反映)시키려 했다. 시집으로 《성벽(城壁)》(37), 《헌사(獻詞)》(39), 《병든 서울》 등이 있다.

 

70. 김달진(金達鎭, 1907~89): 호는 월하(月下), 경남 진해 출생. 중앙불교전문(中央佛敎專門) 졸업. 1932년 <조선일보>에 시가 입선(入選)되어 데뷔, 이어 《시원(詩苑)》 《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돌바위>, <임의 모습>, <금붕어>, <마조천변> 등이 있다. 이들은 동양적인 고담(枯淡)한 정신을 담고 있다. 처녀시집으로 《청시(靑詩)》가 있다. 동국대학(東國大學) 역경원역경위원(譯經院譯經委員)으로 있었으며 불경(佛經) 번역에 주력했다.

 

71. 이용악(李庸岳, 1914~71): 함북 경성 출생. 일본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新聞學科) 졸업. 1935년 <애소유언(哀訴遺言)>, <임금원(林檎園)의 오후>, <벌레소리>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처녀시집 《분수령(分水嶺)》(37)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은 <북쪽>, <장마 개인 날>, <두메산골>로, 민족의 토착적(土着的)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서민의 애환(哀歡)을 치밀하게 표현하였다. 시집으로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이 있다.

 

72. 신석초(申石艸, 1909~75): 본명 응식(應植), 필명은 유인(唯仁). 충남 서천 출생.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졸업. 이육사(李陸史)를 통하여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람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 시는 고답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는 한국 전통적 율조(律調)를 빌어 동양적 허무사상(虛無思想)을 시화(詩化)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시집으로 《석초시집(石艸詩集)》(46), 《바라춤》(59), 《폭풍(暴風)의 노래》(70) 등이 있다.

 

73. 장만영(張萬榮, 1914~75): 황해도 배천 출생. 경성제이고보 및 미자키(三崎)영어학교 졸업. 1953년을 전후하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시단에 등장. 당시 모더니스트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데 비하여, 그의 시는 전원을 소재로 하여 동심(童心)의 세계로 이미지화하려 했다. 처녀시집으로 《양(洋)》을 발간, 「세련된 이미지와 기지(機知)를 주조(主調)로 한 세계」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외 시집 《축제(祝祭)》 《유년송(幼年頌)》 《밤의 서정(抒情)》 등이 있다.

 

74. 이한직(李漢稷, 1921~75): 호는 목남(木南). 게이오의숙(慶應義熟) 중퇴. 1939년 《문장》지에 지용(芝溶)의 추천으로 <온실(溫室)>, <낙타> 등을 발표하여 데뷔, 그의 시는 일상적 제재(制裁)를 통하여 소박한 사념(私念)과 따뜻한 윤리(倫理)를 제시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동양(東洋)의 산(山)>, <낙타> 등이 있다. 비교적 과작(寡作)하는 편으로 작품이 많지 않다. 해방 후의 작품으로 <상아해안(象牙海岸)>, <여백(餘白)> 등이 있다.

 

75. 김용호(金容浩, 1912~73): 호는 추강(秋江), 돈명(豚明). 메이지(明治)대학 졸업. 1938년 처녀시집 《낙동강(洛東江)》을 상재(上梓)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 그의 시풍(詩風)은 초기 <낙동강(洛東江)>, <부동항(不凍港)> 등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현실적 경향이 짙었으나, 후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과 인정미(人情美)를 추구했다.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는 후기 작품이 <주막에서>, <동대문 주변> 등이다. 시집으로 《남해찬가(南海讚歌)》, 《날개》 등이 있다.

 

76. 박남수(朴南秀, 1918~94): 평양 출생. 일본 주오(中央)대학 졸업. 《문장》지에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을 받고 <초롱불>, <밤길>, <마을> 등을 발표하여 데뷔. 그의 시는 농촌생활을 제재(題材)로 서경묘사(敍景描寫)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소박한 서경시(敍景詩) 같으나, 그 고요한 서경 속에 날카로운 감각(感覺)과 기지(機知)가 번뜩이고 있다. 시집으로 《초롱불》(40), <갈매기 소묘(素描)>(57), 《신의 쓰레기》, 《새의 암장(暗葬)》 등이 있다.

 

77. 이호우(李鎬雨, 1912~70): 호는 이호우(爾豪愚). 경북 청도 출생. 《문장》지에 시조(時調) <달밤>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어 <개화(開花)>, <균열> 등의 시조를 발표, 생명 추구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종래의 시조 작가들이 회고투나 영탄조의 작품만을 보여주던 경지를 초월하여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개척했다는 데 시조사적(時調史的) 혁신(革新)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시조집으로 《낙동강(洛東江)》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공저 6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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